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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1) 사도요한이 하나님 보좌 있는 곳에서 보고 온 내용 [계 4:3-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4.22
사도 요한은 지금 그의 영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로부터 오랜 세월 후에 일어날 일을 보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면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로도 미래로도 어느 곳이라도 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 이전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백보좌 대심판 이후에 가게 될 천국 생활도 또한 지옥의 참상도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환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환상으로 보는 것과 사도 요한의 경우처럼 영이 분리되어 영이 직접 가서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렸고 오늘부터는 사도 요한의 영이 보고 온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고 있습니다.
3절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인데, 그분의 모양을 벽옥과 홍보석 같다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을 보고 있지만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얼굴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빛 때문에라도 하나님의 형상의 윤곽을 자세히 볼 수는 없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가게 되면 그 밝은 곳에 있는 사물들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빛에 적응이 되어야 비로소 사물의 윤곽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여러분에게 조금의 어둠이라도 있으면 설령 하나님 앞에 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정확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 어둠이 전혀 없이 성결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만큼 하나님을 닮아 더 온전한 빛이 되어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천국에 가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 영혼들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 있지요. 그것도 더 가까이에서 더 자세히 뵐 수 있으려면 더욱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였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하나님의 얼굴 모습이나 윤곽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양을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먼저 벽옥이라 표현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치 벽옥에 빛이 비춰지면서 반사되어 나오는 여러 가지 빛들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도 다양한 여러 가지 종류의 빛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벽옥 같다’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벽옥은 밝고 아름다우며 눈부신 빛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벽옥에는 청아함 즉 산뜻하고 티 없이 맑으며 정직하고 의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나름대로 이 땅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보석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홍보석 같다’는 것은 밝고 환하여 불꽃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붉고 아름다운 빛깔의 홍보석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홍보석의 빛깔에는 바로 하나님 안에 계시는 성령의 빛이 담겨 있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근본 하나이시기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성령 하나님께서 품고 계시는 빛이 바로 성부 하나님 안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벽옥과 홍보석의 빛깔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홍보석은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했습니다.

무지개는 약속을 의미하지요. 창 9:12-13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했고

16-17절에도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를 상징으로 나타내 주셨던 것이지요. 사람 사이에도 어떤 약속을 할 때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어떤 징표를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세상과의 언약의 징표로서 친히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를 징표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무지개를 보여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언약의 징표로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지개를 자연 현상의 하나로만 해석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무지개가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임을 알아야 하지요.

더욱이 사람의 과학이나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를 그처럼 희한한 모양으로 보여주고 계신지?’ 당연히 그 의미를 궁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지개란 보통, 소나기 등 비가 온 직후에 태양 반대편에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채광을 말합니다. 공기 중의 수증기에 빛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지식은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본 교회에는 지난 1998년 5월 15일부터 희한한 모양의 무지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태양 주위를 동그랗게 두른 원형 무지개이지요. 그리고 원형 무지개를 보여 주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라는 의미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갖가지 희한한 모양의 무지개들을 보아왔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합당한 조건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무조건 초자연적인 현상을 임의로 나타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공의에 맞아야 나타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 공의에 맞는 조건을 통과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갖가지 희한한 무지개를 보여주심으로써 성도님들이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고 계신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미 값을 치르고 공의의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역사들을 보면서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무지개는 꼭 1하늘의 법칙에 맞추어서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져야 보이는 무지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공간을 열어 보여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둘째 하늘의 공간을, 때로는 셋째 하늘의 공간을, 때로는 넷째 하늘의 공간까지도 열어서 무지개를 보여 주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보여 주고 계신 무수한 무지개들은 세상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1하늘에 보여 주시는 무지개는 세상 사람들도 볼 수가 있겠지만 둘째 하늘 이상의 공간을 열어 보여 주시는 무지개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영의 공간에 있는 무지개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무지개에는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원형 무지개를 볼 때는 ‘너와 나 곧 모두가 진리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 됨을 이루어 가신다는 약속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중, 삼중의 원형 무지개는 하늘이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중 원형 무지개는 둘째 하늘을 열어서, 삼중 원형 무지개는 셋째 하늘까지 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이지요. 즉 예를 들어 삼중 원형 무지개는 첫째, 둘째, 셋째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가 동시에 겹쳐져서 보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여러 가지 대칭 무지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하나의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서 모든 것이 베풀어진다는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는 여러분이 무지개에 담긴 이러한 영적인 의미들을 알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보실 때마다 더 큰 믿음이 되시고 또한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공간을 통해 펼쳐 주시는 더 희한하고 놀라운 무지개들을 많이많이 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의 모양과 거기서 나오는 빛을 녹보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여러 가지 빛들을 내는 무지개의 모양을 자신이 아는 지식 안에서 녹보석에 비유한 것이지요. 이 녹보석에는 하나님의 굳건하심과 단단하고 용맹스러우심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레이저쇼와 같은 것을 보면 순간순간마다 두드러지는 빛이 달라집니다. 어떤 때는 붉은 빛이 어떤 때는 푸른빛이 어떤 때는 흰빛이 주로 비추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빛들이 함께 빛을 내기도 하지요.

이것을 보는 사람마다 각각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그 장면을 설명하는 내용이 다를 것입니다. 몇 가지 특징적인 색깔만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혼합된 색깔을 어떻게든 비슷한 색에 비유하여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겠지요.

지금 사도 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들과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로부터 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갖가지 빛들을 보면서 그것을 벽옥과 홍보석, 그리고 녹보석에 비유하여 나름대로 설명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빛을 벽옥, 홍보석, 녹보석이라고 하는 몇 가지 보석의 색으로만 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형형색색의 빛들로 빛나고 있는지를 영감 가운데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장차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는 철저한 서열과 질서 가운데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연회나 행사 때에 각각의 자리가 마련되는 순서도 영적인 서열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지요.

영적으로 그만큼 앞선 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앉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좌우편에는 당연히 우리 주님과 성령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옆으로는 남자 분들 중에 천국에서의 서열이 가장 높은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이렇게 네 분이 계시지요.

그다음 서열이 계속해서 옆으로 있게 되고요. 하지만 서열이 웬만큼 높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올 수 있으려면 적어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장로 안에는 들어와야 하지요.

물론 24장로는 모두 남자 분들이기 때문에 남자 분들의 서열과는 따로 여자 분들도 서열이 있어서 그중에 서열이 앞선 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24장로는 과연 어떤 분들일까요? 이 땅에서 장로의 직분을 잘 감당한 분들 중에서 24장로가 나오는 것일까요? 여러분 모두가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 말씀을 들으시고, 여러분 안에서도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분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차 천국에 가게 되면 이 땅에서 각 사람이 영으로 이룬 정도에 따라 각각의 처소가 정해지게 됩니다. 또한 같은 처소 안에서도 영적인 서열이 정확하게 정해지지요. 24장로라면 당연히 먼저는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사람입니다.

24장로라면 당연히 먼저는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사람입니다. 온전히 성결되었고 생명 다해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지요.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들도 모두가 서열이 정해지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서열이 앞선 분들은 전체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특별히 두드러지는 신앙의 분야를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 소망, 사랑, 충성, 선, 진실, 절개 등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보석 같은 마음을 이룬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뽑아 24장로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별된 스물네 사람이 24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지요. 이들은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같이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 모시고 서서 인간 경작을 잘 받아 나온 자녀들의 대표 격으로서 영원히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마지막 대심판 때에 각 사람의 신앙을 측량하는 기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다가 핍박에 못 견디어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다가 마침내 심판대 앞에 섰다고 합시다. 그는 어떻게든 심판을 면해 보고자 자신의 입장에서 열심히 변명할 것입니다. “나는 너무 심한 핍박 때문에 믿음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때 바로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한 베드로나 사자굴 앞에서도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다니엘과 같은 분들이 나서게 됩니다. 그분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상황과 그것을 이겨낸 신앙을 말하게 될 때 자신을 열심히 변명하던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상급 심판을 할 때도 24장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불같이 뜨거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충성한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때는 24장로 중에 사도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주를 위해 충성한 분에 비추어 그 사람의 충성이 얼마나 값지고 존귀한 것인가 측정을 하게 되지요. 그 결과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경작 6000년의 역사를 통해 나온 그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특별히 선택되어, 각 사람들의 심판에 관한 측정 기준이 될 정도라면, 과연 24장로가 얼마나 영예스러운 자리인지 어느 정도는 상상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그들의 신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의 남자 서열 중에 1, 2, 3, 4위에 해당하는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는 24장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분들의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 네 분은 장차 있을 백보좌 대심판조차도 면제될 만큼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 나온 분들이지요. 그래서 24장로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4장로와는 별도로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 더 가까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좌하게 되지요.

따라서 24장로에 들어가는 가장 첫 인물은 남자 서열 중에서는 5위에 해당하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천국 2서열 즉 서열 6위에서 10위에 해당하는 인물 중에 아직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으신 서열 9위의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도 모두 24장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곧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다윗, 사무엘이지요.

그렇다하여 서열 9위에 해당하는 인물이 24장로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지 않으셨기에 아직은 확정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일단 24장로 중에 5명을 말씀드렸는데, 그들의 뜨거운 신앙과 순결한 삶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 보시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분들이지요. 한 번 주를 만난 후에 평생을 주께 헌신하였던 사도 바울의 열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는 한 번도 힘들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했으며,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영광의 도구로 쓰신 하나님께 감사만 드렸지요.

예를 들어 한 번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마치 쓰레기처럼 성 밖에 내다버린 일도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이런 일을 당하고 나면 두려워서라도 잠시 주춤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일을 당하고도 ‘너무 힘든 일을 겪었으니 잠시 쉬어야겠다.’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행 14:20-21에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난 상황에서도 정신이 들자마자 이처럼 이튿날 곧장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하루를 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더베라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했지요. 주를 위해서라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처럼 자신의 생명이나 몸은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생명 다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돌에 맞고 태장에 맞으면 아픈 줄도 알고, 먹지 못하면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며, 추위와 더위도 느끼지요. 배가 파선하여 깊은 바다를 떠다닐 때나 광야를 하루 종일 걸어 여행하려면 어찌 힘들지 않겠으며 어찌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방인들과 동족조차도 그를 배척하며 죽이고자 자신을 쫓아다닐 때, 어찌 하루라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무릅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과 욕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만 다 내어 드렸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사도 바울에 비할 때 얼마만한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달려 왔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자신의 연단에 지쳐 맡은 영혼들이 시들어 가는 것을 보고도 그냥 방관하여 두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할 때 힘들다거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는 어떤 이유로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서서 사도 바울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주의 일을 위해 달려감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책임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며 갈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감사와 기쁨으로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계속해서 24장로 중에 오늘 알려드린 베드로, 사도 요한, 다윗, 사무엘의 신앙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알려주신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도 계속 설명 드리겠습니다.

24장로는 장차 천국에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위치에 서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인데 그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각 분야에 있어서 인간 경작의 모델과 같이 인정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지요.

여러분도 당연히 ‘나도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가면 좋겠다!’ 이런 소망을 가져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 영광이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성결되어 생명을 다한 충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인정받을 만큼 진액에 진액을 다 쏟아 부었던 사람들에게 24장로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주님만을, 오직 영혼들만을,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한 삶이어야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망은 가지지만 막상 24장로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24장로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누가 과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성경 상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나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하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분명 여러분 중에서도 24장로에 들어가는 분들이 나올 것이며, 그에 못지않은 분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물론 여인들 중에서도 높은 서열의 분들이 많이 나올 것이구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과 소망 가운데 여러분의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마 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대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위해 예비된 천국 새 예루살렘의 그 아름다운 영광을 열심히 침노해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27 오후 7:47:07 Posted
2023-10-05 오전 10:38:0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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