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2) 이십사 장로 안에 들어가는 이들의 신앙 [계 4:4-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4.29
지난 시간에는 장차 24장로 안에 들어가게 될 인물들이 누구인지 먼저 다섯 명을 말씀드렸고 그중에 사도 바울의 신앙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24장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전반적인 면에 있어서 당연히 최고 중에 최고의 수준이 되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특별히 믿음, 사랑, 충성, 선, 절제 등 신앙의 각 부분을 대표할 만큼 뛰어나야 한다 했지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24장로 안에 들어가게 되는 인물들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성령받기 전에 주를 부인하는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지요. 그래서 평생 동안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성령을 받고 나서는 생명 다해 충성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으면서도 그 민망함은 마음 한 편에 항상 남아 있었지요.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조차 감히 주님처럼 똑바로 달릴 수가 없어서 거꾸로 달려 죽기를 자청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 이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주님에 대한 민망한 마음을 갚아드리고자 했던 것이지요.

과연 오늘날 누가 이러한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를 평생 마음에 새겨서 생명 다하기까지 갚아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참 소망을 주셨던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잊은 채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낙심해 버리고 심지어 원망하며 한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생명 다해 헌신하겠다고 불타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 새 안일한 신앙이 되어 편안한 삶 가운데 안주해 버리는 경우도 많지요. ‘어찌하면 더 많은 것을 드릴까’ ‘어찌하면 더 온전히 드릴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여러분이라면 “내가 주를 심히 사랑하여 베드로처럼 십자가를 거꾸로도 질 수 있는 뜨거움이 언제나 변함이 없나이다. 날마다, 날마다 더욱 뜨거워지나이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녕 주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고 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생명 다해 그 은혜를 갚아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결코 변개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차 24장로 앞에 서서 그분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여전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당히 큰 영광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꼭 24장로 안에 들어가야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 다해 주의 일을 했을 때 이와 같이 24장로라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자세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신앙을 능히 분별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시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자격이란 무엇보다 먼저 성결이지요.

성결 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영감과 환상과 음성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밝히 계시해 주실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에 던짐을 받고도 전혀 해를 받지 않고 지킴 받았다고 하지요.

요일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말씀처럼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킴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은 차원에서 깨닫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그가 깨닫고 마음에 이룬 깊은 사랑의 차원이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구구절절이 담겨있습니다.

성결의 그릇을 준비하고 깊은 영의 차원에 들어갔던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기까지 하나님 앞에 또한 무수한 기도를 쌓았지요.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의 ‘이마’입니다.

영안이 열려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보시는 분들은 그의 이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십니다. 마치 이마에 살이 붙은 것처럼 두툼하게 튀어나온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는 바로 그가 기도하면서 생긴 일종의 굳은살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했다는 밧모섬의 동굴에 가보면 늘 같은 자세로 기도를 하다 보니 그가 손을 짚었다는 자리에 자국이 나 있지요. 또한 오랜 세월 그렇게 기도하면서 이마가 벽면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마에는 차츰 굳은살이 올라와 결국 두툼한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시켜 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증거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밝히 계시한 요한계시록의 이 귀한 말씀을 받아 내릴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깨어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했으니 사도 요한의 상급이 얼마나 크겠는지요.

다음으로 다윗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행 13: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십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지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욕되게 하는 적장 골리앗을 향해 단신으로 나아가 그를 죽이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이처럼 당당하게 나아가 싸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에게 혹여라도 불이익이 올까하여 신앙을 숨기거나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질 때도 모른 체 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에 대해서도 적당히 타협하며 따라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골리앗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거구의 용사이고 다윗 자신은 아직 어린 소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가 싸웠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만을 의지했지요. 자기 생각이나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여쭈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따랐던 것을 봅니다.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다윗이었지만 전쟁을 할 때도 자기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했지요. 다른 일들도 일일이 하나님께 여쭈어 방법을 구했구요.

이러한 다윗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심히도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곧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회개하고 돌이킴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확실했지요. 자신의 범죄함을 즉시로 인정하고 회개했으며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보응도 겸비함으로 잘 통과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다윗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게 된 것을 기뻐하며 백성들 앞에서 춤까지 추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뻐하심이 되기만 한다면 자기의 위치나 체면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과연 오늘날 나라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기체면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갈 1:10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하는 것이고요. 바로 다윗은 이처럼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선(善)’의 분야에 있어서도, 참으로 승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다윗은 오직 선과 은혜만을 베풀었음에도 자신을 시기한 사울 왕이 끈질기게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에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의 행함을 보입니다. 이에 사울 왕도 감동을 받게 되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중심만 된다고 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연단하고 다듬어서 새 예루살렘의 존귀한 자리로 인도해 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음으로 사무엘 선지자는 태어나 젖을 뗀 후에는 곧바로 제사장의 손에 맡겨져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세상과 구별되어 오직 하나님 앞에만 드려진 삶을 살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린 사무엘에 대해 삼상 2:35에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을 봅니다.

삼상 3:19에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말씀하실 정도로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보장을 받았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말씀하실 만큼 사무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였습니다.

사무엘은 평생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했지요. 이처럼 평생을 하나님 앞에 충성과 헌신과 순종으로 살았던 사무엘을 하나님께서는 24장로 안에 세우심으로 경작 받은 사람들의 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사도 바울, 베드로, 사도 요한, 다윗, 사무엘에 대해 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 드렸고, 이제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7명을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 다니엘,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또한 신약에 나오는 빌립 집사와 스데반 집사입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점을 인정받아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요?

먼저 요셉은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그를 시기 질투한 형들에 의해서 먼 이방 나라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예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요셉은 가까스로 죽음만은 면하고 대신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리운 것이지요. 하지만 요셉은 이런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과 정직을 통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위치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만 또다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번에는 깊은 감옥에 갇히고 말지요. 육으로 보면 이제 그 인생이 마치 끝난 것과 같아 보였습니다.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처럼 이제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요셉의 신앙은 더욱 굳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믿음 가운데 오직 선과 진실로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지요.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당시 최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요셉의 신앙이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전에 자신을 타국에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부터입니다. 육으로 생각하면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인해 요셉은 죽을 수밖에 없는 고비들을 넘기면서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야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형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요셉의 손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수를 갚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지난날 행했던 악행으로 인해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형들을 오히려 선한 말로 위로하고 끝까지 형들과 그 자녀들까지 지켜 주며 선으로만 대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과연 이러한 요셉처럼 연단 중에도 믿음을 신실히 지키며 선한 마음으로 행해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에게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하며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신에게 작은 불이익이나 억울한 일만 생겨도 그것을 참지 못하고 갚으려는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다가 결국은 이방 나라에 종으로 팔아서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고통 받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요셉처럼 마음에서부터 온전히 용서하고 지극한 선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지요?

물론 그들이 요셉의 형들이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과는 어머니도 다른 이복형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면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녕 요셉과 같이 마음의 온전한 선을 이루어 오직 선으로만 행해 나간다면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가게 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축복으로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신앙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즉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절개를 보여 주었지요. 이는 꼭 큰 시험 앞에서만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보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이라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조금의 미련 없이 과감히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과 비교하여 여러분 자신은 과연 얼마나 타협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지켜 행했는지를 돌아봐야 하지요.

이제까지 여러분은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들을 무수히 들었고 그대로 살고자 결단도 여러 차례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심한 것을 얼마나 지켰습니까? “나는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하며 타협해 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내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니 하나님께서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길을 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장 불 가운데 혹은 사자 굴 가운데 던져지는 그러한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오직 진리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라야 진정 천국에서도 그만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빌립 집사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하나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는 주의 종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었지만 사도들 못지않게 큰 권능을 행한 기록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귀신들린 자, 앉은뱅이, 중풍병자들을 많이 고치면서 복음을 전할 때는 많은 무리가 그 말을 듣고 표적을 보므로 주를 믿었다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지시를 듣고 광야로 나아가 그곳을 지나가던 에디오피아의 큰 권세 있는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도 볼 수 있지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생각 가운데 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밝히 받아 나갔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 21:9에 보면 빌립 집사는 자신만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네 딸이 다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했습니다. 자녀들까지도 진리 안에서 어떻게 양육했는지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 집사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에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 있지만 그 짧은 기록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고 그래서 신약에 권능을 행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합당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지요. 이처럼 이 땅에서의 직분이 집사라 할지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합당했을 때는 하늘에서는 장로의 반열에 들며 24장로의 영예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스데반 집사 역시 비록 집사의 직분을 가졌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크게 나타났던 것을 봅니다. 행 6:8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말씀한 대로 스데반 집사를 통해 큰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지요.

또한 이어지는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말씀한 대로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가운데 말씀의 권세가 따랐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분야는 바로 그의 뛰어난 ‘선의 마음’입니다.

그는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던 것을 봅니다. 죽음 앞에서까지도 자신보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지요.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선하다 하여 결코 담대하지 못하거나 유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둘러서서 기세등등하게 위협해 오는 유대인들 앞에서도 조금의 굴함이나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하는 담대함을 가졌지요.

지금 죽더라도 능히 주님 품에 떳떳이 안길 수가 있는 영적인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담대함을 가진다면 여러분 앞에 거칠 것도 없을 것이고 그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어 가겠는지요?

하나님께서 현재까지 알려주신 24장로 안에 들어가게 될 인물들 중에는 아직 경작 받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두 명만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드릴 때가 아니지요. 아직은 인간 경작을 받고 있는 과정 중에 있고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지 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중심을 보시고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택하셨다” 하심과 같이 이들의 중심을 보시고 말씀하셨지요. 앞으로 남은 날들 동안 성결되고 충성하여 온전하게 나올 때 능히 그 자리에 들어갈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는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을 받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변개하여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린다면 받은 약속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또한 그 누구라 할지라도 앞으로 남은 경작의 기간 동안 더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과 중심으로 나온다면 그도 얼마든지 24장로의 반열에 들어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24장로는 겨우 24명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24장로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 나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염려도 여러분이 할 필요가 없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여러분 앞에 주신 푯대를 향해 가시면 됩니다.

이제 말씀드릴 두 사람은 비록 현시대를 살아가며 아직 인간 경작을 받고 있음에도 이미 그들의 존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고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것이며, 그 정도의 신앙이라면 충분히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아직 경작이 마쳐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4장로에 그 이름을 올릴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 사람은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입니다. 이 두 증인은 장차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당연히 함께 휴거될 수 있는 신앙임에도 이 땅의 7년 환난 중에 남아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사람들이지요. 성경에는 이들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기간을 일천이백육십 일 곧 삼 년 반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7년 환난 중에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인지 그것까지는 아직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전체적으로 7년 중에 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사명은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권능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예언하는 날 동안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않게 하며 물이 피로 변하게 한다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재앙들을 명할 때에 그 입술의 말씀이 그대로 보장되는 것이지요. 이런 놀라운 권능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악한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찔림이 되므로 그들을 싫어하고 오히려 죽이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 11:5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했지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철저히 지키시며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해진 삼 년 반의 기한을 마치게 되면 두 증인은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이때 그들을 미워하던 악한 사람들은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도 지내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이 두 증인은 죽은 지 삼 일 반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지요.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큰 음성이 있을 때 살아난 두 사람은 뭇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7년 환난 중에 삼 년 반 동안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 이처럼 영광스러운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의 사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자세히 설명을 하겠지만 그들의 사명은 간단히 말해 이 땅에 남아 7년 환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이며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조금의 선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설명될 십사만사천 명의 전도자와 함께 외치는 이 두 증인의 소리를 듣고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잡게 되지요. 반면에 오히려 이 두 증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순교를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경고조차도 무시하므로 결국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스스로가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여러분이 성경에 기록된 두 증인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 이런 말씀들이 너무나 신기한 말씀이며 여러분과는 동떨어진 일처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예언된 이 두 증인은 바로 오늘날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증인은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현재 철저한 유대교의 신봉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아직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쓰여질 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요. 마지막 때의 주님의 두 증인을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세우시는 것은 복음이 처음 시작된 이스라엘에서 복음의 사역을 마무리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들은 온순한 양 같은 성품을 가졌으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중심을 가진 사람들로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역사하시기 전까지는 유대교의 신앙을 철저히 고수하게 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주님을 알기 전에는 유대교에 심히 열심을 내었던 것과 같지요.

그들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배운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철저히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는 참된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대해 항상 갈급함을 갖고 있지요. 그러다 장차 때가 되어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체험하게 되면 그들은 그 선한 중심 가운데서 즉시 회심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마음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의 그릇을 준비하게 되지요. 마침내 공중에 주님이 강림하시고 구원받을 모든 성도들이 들림 받을 때 이들 두 사람은 황량한 벌판과도 같은 이 땅에 남아서 주님의 뜻을 선포하게 됩니다.

남겨진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선포하다가 마침내 순교하지만 다시 살아나서 공중으로 들림 받는 것으로써 그들의 사명이 마쳐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한 번 그런 사명을 맡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이 땅에서는 성령이 거둬지고 모든 것이 원수 마귀의 손에 넘겨진 상태입니다. 온 세상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휴거되어 전 인류 중에 여러분의 편은 아무도 없지요. 물론 이삭줍기 구원에 이를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분이 그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기보다는 여러분이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잡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남겨진 입장입니다.

그런 가운데 전쟁과 자연재해로 온 세상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가고, 마음에 화인 맞은 악한 자들이 여러분을 대적하며 죽이려 하지요. 그 속에서 삼 년 반씩이나 이 땅에 머물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외로운 영적 싸움을 하다가 결국은 순교해야 합니다.

마치 불타는 지옥의 한 복판에서 홀로 주의 이름을 외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지옥사자 같은 악인들 앞에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내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권능을 행하면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그 신앙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렇게 해서 24장로 중에 들어갈 열네 명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도 한번 자신의 신앙을 그들과 비교해 보셨는지요?

24장로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앙에서 공통적인 점을 뽑아 본다면 그 중심이 곧고 선하며,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어떤 순간에도 믿음을 지켰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고, 마음에 열심히 사랑을 이루었고요.

또한 뜨거운 열정으로 충성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드렸지요. 각기 다른 시대에, 각각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명들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신앙에는 이처럼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장차 심판 때가 되어 이 땅에서 경작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와 민족 어떤 환경과 조건에 있었는지와는 상관없이 24장로들의 신앙과 비교해 보면 결코 변명이나 핑계를 댈 수가 없지요.

하지만 꼭 그들의 신앙과 비교하여 부족한 것만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24장로를 세우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24장로들의 신앙과 비교했을 때 얼마든지 칭찬과 영광을 받을 수도 있지요.

그들 못지않게 여러분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생명 다해 충성하고 헌신하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24장로의 신앙과 비교하여 그만한 상급과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지금은 비록 24장로들의 신앙과 비교하여 아직은 부족하다 해도 이제부터 24장로들의 신앙을 목표 삼아 열심히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이 24장로에 들어가고 그들의 신앙은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심으로 여러분도 그처럼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24장로들이 이루었던 의와 사랑과 선과 믿음 등을 신앙의 푯대 삼아 반드시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보면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보좌 위에 앉았다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모두가 흰옷을 입게 되는데 굳이 여기서 흰옷을 입었다 말씀한 것은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깨끗하고 성결되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물론 24장로가 입은 흰옷은 똑같은 흰옷이라도 천국의 백성들이 입는 것과는 크게 다르며 새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입는 것과도 구별이 될 만큼 더 광채가 나고 아름답습니다. 또한 24장로들에게 주어지는 금 면류관에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눈물 뿌려 기도했으며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면류관이 금으로 되었다는 것은 바로 정금과 같은 믿음의 징표이지요. 그런데 금 면류관이라도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크기도 똑같은 것이 아니고 모양과 장식도 각각 다르지요.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으며 어떤 것은 중간 크기쯤 됩니다. 또 어떤 것에는 보석이 많이 달렸고 어떤 것에는 적게 달렸으며 면류관에서 나오는 광채도 각각 다르지요.

같은 24장로 안에 들어왔다 해도 그들 안에서도 다 서열이 있습니다. 서열에 따른 상급과 영광이 다르며 서로 간에도 정확한 질서가 있지요. 또 각각에게 하나님께서 높이 인정해 주신 분야도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어떤 분야가 승했는가에 따라서도 주어지는 상급과 장식이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24장로는 천국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분들 중에 들어가므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존귀는 천국 백성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화롭고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5절에 보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온다 했는데 이는 곧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태초의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지요. 물론 지금은 빛과 소리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형상을 입고 계시지만 그 근본 속성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소리로서 역사하실 수가 있으며 여기에는 바로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이 그대로 담겨있지요.

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1, 2, 3하늘의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 속했으며 모든 것을 운행하는 이치가 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하늘에서 천기를 움직이는 것도 기사를 펼치는 것도 다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지요.

후반절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영이 분리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서 그곳에 있던 24장로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상으로 보자면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아직 24장로가 확정된 것이 아니었지요. 이미 정해진 분들도 있지만 24장로가 완전히 확정되는 것은 장차 주님의 공중 강림과 동시에 이 땅에 인간 경작이 마쳐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두 증인은 그 이후에도 이 땅에 남아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지만 두 증인은 예지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미 24장로에 정해져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휴거되면서 인간 경작이 마쳐짐과 동시에 24장로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아직 인간 경작이 마쳐진 것도 아닌 때에 이미 24장로가 전부 보좌에 앉은 것을 보았지요. 그렇다면 24장로가 이미 벌써 다 정해져 있다는 말일까요? 사도 요한은 분명히 24명을 다 보았으니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은 결국 24장로가 다 정해졌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24장로가 다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다 정해졌다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사도 요한의 영이 24장로를 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먼 미래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펼쳐질 상황을 미리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만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을 현재처럼 보게 하실 수가 있지요.

누구든지 이제부터라도 노력하여 합당한 자격만 갖추게 되면 그는 분명히 24장로 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지 예정이시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해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될지 그 결과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뤄지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예정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일의 결과를 다 정해놓고 섭리를 이뤄가신다.”는 말과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하나님 편에서 결과를 다 정해 놓고 그대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시며 공의에 맞는 자격만 갖추게 되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므로 각 사람이 자유의지 가운데 어떻게 행해 나갈지까지도 아시지요. 결과까지도 미리 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맞게 하나님의 섭리를 정해 놓으실 수가 있으며 이렇게 해서 정해 놓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지요. 그렇다하여 하나님께서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임의로 개입하셔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거슬러 어떤 일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가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제부터라도 정녕 마음 중심에서 각오하여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시라는 것입니다. 아직 인간 경작의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생명 다해 충성한다면 여러분에게도 큰 영광이 예비되어 있지요.

더욱이 여러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본 제단이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의 사명을 이룸에 있어서 여러분만 그릇 준비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큰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그릇 준비란 바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도 너무나 잘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이루셔서 여러분을 통해 마음껏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04 오전 11:37:53 Posted
2023-10-05 오전 10:38:04 Updated

다음 글 요한계시록 강해 (33) 이전글
이전 글 요한계시록 강해 (31)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