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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5) 일곱 인, 일곱 뿔, 어린 양 [계 5:5-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5.20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안팎으로 써져 있고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책은 바로 인간 경작의 모든 기한이 차고 나면 마지막 때에 펼쳐지게 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담긴 책이지요. 봉인이 떼어짐과 동시에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책의 봉인은 아무 때나 함부로 떼어서는 안 되며 아무나 뗄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확한 때가 이르러 그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떼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이 봉인을 뗄 자격을 갖춘 존재가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없었지요. 봉인을 떼어야 만이 비로소 인간 경작 6천 년의 모든 역사가 마무리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토록 기다리던 7년 혼인잔치와 천년왕국 그리고 영생을 누릴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봉인을 떼어야만 이루어지게 되지요. 지금 이 봉인을 떼어야 할 때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봉인을 뗄 자격을 갖춘 이를 찾으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낙심되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만 울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24장로 중에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기쁜 사실을 말해 줍니다.

계 5:5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란 바로 유대 지파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행 13:22-23에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말씀하고 있지요.

구세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지요.

이러한 주님과 믿음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도 부활의 열매로 나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인봉을 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 경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주도권은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앞으로 있을 7년 환난 동안 원수 마귀 사단이 마음껏 자기들의 권세를 휘두르지만 그렇다 하여 7년 환난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봉인된 책의 인을 떼셔야 그 책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마지막의 모든 것이 펼쳐지게 되지요. 7년 환난 동안 이 땅에 펼쳐질 환난과 재앙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신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때에 맞추어 허락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이 모든 일의 주체가 주님이시며 따라서 주님에게만이 봉인을 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십사 장로 중의 하나로서 이러한 모든 섭리를 알고 있는 이가 지금 사도 요한에게 인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것을 말해 주고 있는 이십사 장로 중의 하나는 누구일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섭리에 대해 밝히 깨우치고 그것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정립해 놓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지요. 더욱이 사도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곳곳에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관을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인간 경작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마지막 때에 대해서도 밝히 계시 받았지요. 그러므로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주님에 대해 사도 바울만큼 잘 알아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24장로 중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사도 요한에게 말을 하고 있는 24장로 중에 하나는 바로 사도 바울인 것입니다.

계 5:6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24장로 중에 하나인 사도 바울로부터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사도 요한의 눈에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보입니다. 여기서 어린양이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지요.

양은 짐승들 중에서 가장 순하며 순종도 잘하고 사람에게도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로 물거나 다투고 싸우는 악한 모습이 없고 사람을 위해 털, 가죽, 고기 등 모든 것을 줌으로 오직 유익만을 주지요.

예수님도 이런 양과 같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오직 우리에게 유익만을 주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그냥 ‘양’이 아니라 ‘어린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어린양과 같이 흠도 점도 티도 없이 깨끗하시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를 보면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재앙을 면하도록 하시기 위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시지요. 일 년 된 숫양이란 아직 교미하기 전의 양이기 때문에 정결하고 깨끗한 상태의 양을 말합니다.

이러한 어린양처럼 전혀 죄 없이 깨끗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쏟고 죽으신 것이지요. 그것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으셨으니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양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시고 중보자가 되어 주셨음을 나타내지요. 이에 요일 2:2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이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지요.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영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을 통해 이 땅의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사람의 마음도, 생각도, 행함도 감찰하시며 이렇게 감찰하시고 측정하신 결과에 따라 각 사람의 응답과 축복의 여부를 결정하시지요.

일곱 영을 일곱 눈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은 일곱 영에게는 이처럼 감찰하고 측정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일곱 눈이란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감찰하시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기준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측정하신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계 4:5에서는 일곱 영을 일곱 등불이라 하셨는데 이 역시 일곱 영은 아무리 어둡고 은밀한 곳에 있는 일이라도 밝히 비춰서 감찰한다는 의미로 등불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에 대해 우리 사람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등불이나 눈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일곱 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뿔”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시 18:2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말씀하고 있지요. 여기서 뿔은 힘과 권세, 능력, 도우심 등을 의미합니다.

눅 1:69에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했는데 이때도 뿔은 힘과 권세와 능력을 의미하지만 특별히 “통치자”나 “왕”을 의미하지요. 다음으로 시 75:5에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뿔”은 자아, 자존심, 자기 의와 틀 등을 의미하지요.

여러 의미들 중에서 본문에 나오는 일곱 뿔의 뿔은 왕이나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어린양이신 주님에게 일곱 뿔이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완전한 왕이요 통치자로서 인간 경작의 모든 역사를 감찰하시며 주관해 가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곱 뿔도 결국은 모든 것의 주관자로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정확하게 판단하시고 지배하며 다스리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주관해 가시기 위해서 바로 일곱 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일곱 뿔은 곧 일곱 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일곱 뿔 역시 일곱 영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통해 일곱 영의 또 다른 역할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연단하시는 역할이지요. 일곱 영은 각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측량할 뿐만 아니라 부족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것을 채우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으로 뿔은 찌르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영적으로도 뿔에는 찌르는 역할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는 도구의 의미가 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마음에 자존심, 자아, 자기 의와 틀이라고 하는 뿔이 잔뜩 나 있다고 할 때 그 뿔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찌르겠습니까?

그렇게 찌르는 것이 결국은 상대의 마음을 연단하는 도구가 되지요. 뿔에 찔림을 받는 사람은 마음의 연단을 받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연단을 통해 더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오게 되지요. 내 자신이 상대를 찔러서 마음을 연단하는 뿔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누군가 뿔로 찔러서 여러분의 마음을 연단해 온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서 통과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뿔에는 마음을 연단하는 역할이 있는 것처럼, 일곱 뿔 역시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동시에 각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연단 받게 함으로 마침내 합격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도록 인도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지요.

즉 일곱 영의 역할이 단순히 모든 것을 감찰하고 측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응답을 위한 합격의 기준에 온전히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해 주는 역할도 있다는 말입니다. 일곱 영은 하나님의 마음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곧 성령님의 마음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일곱 영에게는 돕는 영으로서 사역하시는 성령님의 속성도 이처럼 함께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 5:7에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유일하게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주님께서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책을 취하십니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을 떼고 모든 것을 이루실 수도 있지만 이처럼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성취해 가도록 하셨지요. 이처럼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있던 책을 취하심으로 이제 모든 일의 권한이 주님에게로 옮겨졌고 주님께서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주님께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임의대로 해 나가신다는 뜻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당연히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십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인을 떼며 주관해 가시는 것은 주님으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지요.

계 5:8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양 즉 주님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주님의 권세와 위엄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며 이제부터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갈 권한을 가지신 주님 앞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거문고와 금 대접이 나옵니다. 이때 거문고와 금 대접은 각각 성도들의 찬양과 기도의 향을 측량하는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들입니다. 거문고는 여러분이 마음에서 얼마나 기쁨과 감사를 담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는지를 측량하지요. 금 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를 측량하구요. 금 대접에는 향이 가득한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 했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찬양과 기도는 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에는 우리 개개인을 살피도록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천사가 있어서 이 천사가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향으로 받아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게 되지요.

물론 이 천사가 직접 하나님 앞으로 향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며 중간에 천사장이 모아서 가져가게 됩니다. 이 향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분량에 차면 그에 합당한 응답과 축복이 주어지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올리는 찬양과 기도의 향이 모두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굵은 향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가느다란 실 같은 향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요. 아주 진한 향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약한 향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요. 따라서 똑같이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흠향하시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을 때 어떤 굵기의 향으로 기도를 올리느냐에 따라 각각 응답에 필요한 분량을 채우는 기간도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아주 굵은 향의 기도를 올려서 하루 만에 응답에 필요한 기도의 분량을 채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주일, 열흘 이상 기도를 해야 겨우 필요한 분량을 채우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기도를 해도 아예 향이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먼저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예 듣지를 않으십니다. 사 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또한 졸음과 잡념 가운데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아예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가 없습니다. 공중 권세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기도의 향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훼방하며 흩어버리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이 되는 기도만이 금 대접에 담겨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상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의 기도의 향을 금으로 된 대접에 받도록 하신 것일까요?
금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향을 받으시기에 금 대접에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볼 때 금 대접에 향이 가득하다는 것은 이제 인간 경작의 기한이 거의 다 찼음을 의미하지요. 그동안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모든 기도와 찬양의 향을 종합적으로 측량하실 때가 이제 다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9-10절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주님 앞에 드리는 새 노래의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이 내용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기도 한마디 찬양 한마디도 다 향이 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한다고 해도 그것이 전혀 향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말씀드렸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와 찬양은 지금 어떤 향으로 올려지고 있을까요? 설령 찬양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목소리나 실력 자체를 보고 평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하는 여러분의 마음 중심의 향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심을 모아서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의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을 다해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처럼 금요철야에 나와서 찬양을 올렸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네 찬양의 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신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졸음을 못 이겨 힘들어 하면서 입만 달싹달싹하며 찬양을 드린다면 그것은 향이 되어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지요.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중심으로 정성을 다해 올려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매일 매일 다니엘 철야에 나와서 기도한다 해도 정작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런 기도는 응답될 수가 없지요.

그러니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네.’ 하며 결국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요.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편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그러한 기도를 올려드리지 못한 것을 돌아보고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잘 명심해서 여러분이 매 순간 드리는 찬양과 기도가 정녕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그러한 굵고 진한 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과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아름답고 충만한 향으로 올려 진다면 하나님께서 ‘누가 내 앞에 이런 기도와 찬양을 올리는가?’ 하시며 보좌에서 일어나 당연히 여러분을 바라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의 기도의 향이 쌓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에 힘이 된 만큼 그 모든 것은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심판 날에 여러분에게 상급으로 주어집니다. 반면에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아무런 상급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드리는 매 순간의 기도와 찬양이 온전한 향으로 올려지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기자도 시 102:1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고백했지요. 이처럼 여러분의 기도와 찬양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여러분이 올려드리는 향이 주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25 오후 2:22:04 Posted
2023-09-22 오후 4:38:0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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