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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9) 네 천사, 십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 [계 7:1-1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6.24
계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일 후에”라는 것은 6장까지 설명한 모든 일들이 있은 후의 상황을 말합니다.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았다는 것은 손으로 바람을 쥐고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천사들이 바람을 주관하는 권세를 받아서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람뿐만 아니라 지구의 기후와 하늘의 해, 달, 별들이 운행하는 모든 이치도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해 나가는 것이지요. 천사들이 땅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았다는 것은 지구의 동서남북 전역에 곧 온 세상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바람 한 점 없는 상황을 여러분은 과연 상상할 수 있으신지요? 당장 공기가 얼마나 탁하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동원하면 온 세상의 바람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공간을 열어 조절하게 되면 이처럼 바람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까지 영의 공간을 이용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수없이 체험해 왔기 때문에 이런 일들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두꺼운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영의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그 구름들을 영의 공간 안으로 빨아들이시면 순식간에 맑은 하늘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구름이나 비가 필요하다면 이때도 영의 공간을 열어 다른 지역에 있는 구름을 순간에 필요한 지역으로 옮겨오면 되지요. 구름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큰 태풍이 온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영의 공간을 열어 그 태풍을 빨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공간 안에서 그 태풍을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고 혹은 태풍의 세력을 약화시킨 후에 다시 육의 공간으로 내보낼 수도 있지요. 물론 그때마다 가장 적합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 이루게 될 것인지가 정해집니다.

즉 태풍을 항상 소멸시켜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세력을 약화시키기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잠시 붙잡아 두었다가 진로만 바꿀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처럼 바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멎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모든 현상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여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서 주관해 나가게 되지요. 이렇게 바람이 완전히 멎어 버렸을 때 이 땅에서는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까요? 태풍과 같이 너무 심한 바람이 불어도 큰일이지만 반대로 바람이 전혀 없으면 이는 지구 전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구 전체적으로 공기와 바닷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게 되지요. 열대 지방에서 데워진 공기가 추운 지역으로 이동하고, 반대로 추운 지역의 찬 공기가 더운 지역으로 이동하므로 지구 전체의 온도가 조절되며 유지됩니다. 바다의 따뜻한 난류와 차가운 한류가 계속 순환하는 것도 지구의 온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바람이 없으면 공기도, 바닷물도 이동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더운 곳은 점점 더 더워지고, 추운 곳은 점점 더 추워지는 것입니다. 사막 지역은 점점 더 확대되고 극지방의 얼음도 점점 더 확장되어 결과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입니다.

또한 바람이 없으면, 바다에서 생긴 구름이 육지로 이동할 수가 없으니 내륙 지방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고 해안 지방에는 수시로 비가 오게 됩니다. 공장 지대나 자동차 매연이 심한 도시에는 신선한 공기가 새롭게 공급될 수 없으니 점점 오염은 심해져만 갈 것이고, 결국 숨을 쉬기도 어렵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만 생각해 본다 해도 바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를 알 수 있지요. 6장까지의 말씀에서 살펴본 대로 이때는 온 세상이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가뜩이나 환경이 오염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까지 멈춰 버리니 그만큼 환경오염은 더욱 악화되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본문에 천사들이 바람을 멈추게 했다는 것은 단순히 육적인 바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바람의 두 번째 의미는, 영적인 뜻으로서, “환난과 전쟁”을 뜻합니다. 곧 바람을 멈추게 했다는 것은 7년 환난에 접어들면서부터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많은 전쟁과 환난들이 아주 잠시 동안은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이어지는 2절 말씀부터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종들이 인침을 받는 잠시의 기간 동안은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는 재앙들이 잠시 수그러들며 잦아드는 것입니다.

계 7:2-3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사람 사이에서 어떤 계약을 하게 되면 그것을 확증하는 “인”을 치게 되지요. 그래서 “인”에는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인”이라 나오는데 요한은 굳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라 해서 “살아 계시다”는 표현을 넣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역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인치신 것은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왔다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해 돋는 데를 설명할 때 그곳이 동방에 있는 어느 특정 나라나 지역을 지칭한다고 하는데 영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해 돋는 데”란 이 지구상의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바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계신 곳,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받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받아왔다고 하면 될 것을 이처럼 해 돋는 데로부터 받아왔다고 표현한 것일까요? 이 안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해’는 낮, 밝음을 의미하며 세상이 돌아가는 기점이 됩니다. 즉 해가 뜨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하루 24시간, 사계절과 절기, 연수 등이 정해진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해가 세상의 모든 것이 돌아가는 기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시며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기준이 되심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데를 본문에서는 해 돋는 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해 돋는 데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세계에 계시지만 이 육의 세계 어느 곳에도 계셔서 천지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세상 어디를 가도 “해 돋는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동쪽을 보면 바로 그 쪽에서 해가 돋지요. 아프리카의 오지나 남미의 어느 깊은 산 속에서라도 해가 돋는 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세상 어디에나 계셔서 천하 만물과 인생들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 돋는 데”라는 한 구절 안에도 여러 가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이처럼 해 돋는 데로부터 천사가 올라왔는데 이 천사가 등장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온 인류가 멸망해 가는 7년 환난 가운데서도 마지막으로 또 한 번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천사가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큰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무수한 천사들 안에서도 뚜렷한 서열이 있고 각각의 사명에 따라 위엄과 권세가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을 직접 가지고 온 천사라면 마치 이 땅에서는 왕의 친서를 전달하는 사자와 같은 위치로서 그만큼 큰 권세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계 7:3-5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 안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나 되는 인 맞은 하나님의 종들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서는 요한 계시록 내용 중에서도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때는 이미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다 들림 받아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갔는데 다시 하나님의 종들이 등장하고 있지요.

더구나 그 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대로 각각 일만 이천 명씩 총 십사만사천이나 되는 큰 무리가 나오니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온갖 억측과 잘못된 설명들이 나오기도 하지요.

혹자는 7년 환난 때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7년 환난 때 순교해서 구원받는 수가 총 십사만 사천 명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성경을 기록케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풀어 주셔야만 알 수가 있지요.

이 십사만 사천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들은 7년 환난의 기간 동안에 특별한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는 종들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모두 끝난 것과 같은 절망의 시대 속에서 다시 한 번 구원의 도를 선포하여 이삭줍기 구원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 종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7년 환난 중에 떨어진 영혼들 중에도 마음이 강퍅해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거나 또는 주님에 대해 누군가 제대로 전해 주지 않아서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 볼 수도 없는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권 중에서도 아주 고립되어 외부 환경에 접할 수 없었던 지역이라면 그곳에는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도 혹 양심이 선하여 복음을 듣기만 하면 영접할 만한 사람이 있지요.

또한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지만 왜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지에 대해 누군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 경작의 기한은 이미 끝이 났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혼들에게도 다시 한 번 구원의 기회를 주기 원하시므로 십사만 사천의 전도자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농부가 땅에 떨어진 이삭 한 줄기라도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주워 담듯이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을 살피고 또 살피시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이러한 사명을 맡은 전도자들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나오는 것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꼭 육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전 세계 각 민족 중에서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로서 물론 그중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믿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가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이지요. 혹은 예수님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을 때 선한 양심 속에 막연히 믿어지기는 했으나 마음이 심약하므로 그 순간 결단하여 주님을 선택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요.

그러나 눈앞에서 휴거 사건을 맞게 되고 7년 환난의 상황들을 맞게 되자 이들은 선한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식적으로라도 기독교에 대해 알았던 것이 있고, 현실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의 인침 받은 사람들이 주님과 복음에 대해 깨닫게 되면 이제 이들은 생명을 걸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자신이 구원받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어찌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자기가 깨우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요.

이들은 복음 전파를 싫어하는 자들에 의해 순교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극심한 자연재해와 전쟁 가운데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7년 환난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하기에 그 가운데서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사실 되도록 빨리 육의 몸을 벗는 것이 오히려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인을 치신다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 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은 표로써 마음에 성령으로 인을 쳐주십니다. 그러나 7년 환난 때는 이미 성령이 거두어진 시대요. 따라서 마음에 인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성령님의 도우시는 역사도 없이 오직 자기 의지로 순교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우신 것이므로 비록 성령이 거두어진 상황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7년 환난의 극심한 재앙 속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모든 환경과 조건 속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보장으로 인을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 곳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뒤늦게나마 이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계 7:9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 명의 전도자의 전도를 받아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아직 마음에 일말의 선한 양심이 있어서 이제라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할 만한 사람들이 그래도 이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은 순교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연 재해와 전쟁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이 차라리 7년 환난의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더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뒤늦게나마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음에도 고통을 이기고 승리해야 하는 순교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도 7년 환난의 재앙으로 인해 죽게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평안하게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 하여 여러분이 혹여라도 이 말씀을 듣고 ‘설령 7년 환난에 떨어진다 해도 꼭 순교만 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법도 있구나’ 하며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7년 환난 중에 주님을 믿게 되고 그 재앙 가운데서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인해 죽어서 그나마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은 이전에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쭉정이 같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 땅에 떨어진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대부분 이전에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거나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또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어서 마음에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지요.

반면에 주님을 믿는다 하였고 분명한 믿음의 증거를 보면서 신앙생활 했음에도 여전히 쭉정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함으로 결국 이 땅에 떨어지게 된 사람들은 그처럼 쉽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순교”라는 과정을 통해 이전에 행했던 자신의 죗값을 철저히 치러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그러면 7년 환난 중에 구원받은 영혼들이 장차 천국에서 거하게 될 처소는 어디일까요? 먼저 기억할 것은 십사만 사천 전도자들과 그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영접한 사람들은 그 처소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의 경우는 그들이 고문이나 핍박으로 죽든지 아니면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저런 재앙으로 죽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생명까지 드린 믿음의 4단계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장차 그들이 들어가게 될 처소는 3천층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십사만 사천 전도자들의 말을 듣고 구원받은 무수한 사람들은 단지 구원받은 차원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하는 천국의 처소인 낙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중에는 혹여 혼동이 된다 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설명하실 때는,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은 아무리 고통스럽게 순교를 해도 부끄러운 구원이요 낙원에서도 구별된 가장자리에 들어간다 했는데 왜 이번에는 순교했기 때문에 3천층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또 ‘7년 환난 때는 고문이 너무나 잔혹하기에 순교하여 구원받는 수가 지극히 적다 했는데 오늘은 왜 그 수가 지극히 많다 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동될 것이 없습니다.

7년 환난 중에 참혹하게 순교해야 겨우 구원을 받고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쭉정이 신자들을 말합니다. 7년 환난 전에 이미 복음을 들었고, 나름대로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참 믿음이 없어 세상과 타협하며 살다가 이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들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사람들은 그 중심과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으되 선하게 살았고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게 된 후에는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두 증인과 함께 마지막 때 들어 쓰시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생명 다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마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 시대에 순교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3천층에 들어갈 자격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3천층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말씀이 계 14장에 나옵니다.

계 14:4-5에 보면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다시 설명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말씀하고 있지요.

앞에서 6장을 설명할 때 쭉정이 신자들은 그들이 간신히 순교하여 구원을 받았다 해도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고 마음의 할례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십사만 사천의 전도자들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더욱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했는데 여기서 “여자”란 “세상”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다는 뜻입니다.

또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말씀처럼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만 하여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니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능히 3천층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계 7:9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들 곧 십사만 사천의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 사람들도 쭉정이 신자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했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복음을 듣고도 세상과 타협하여 죄 가운데 살았던 쭉정이 신자들과는 달리 믿음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지요.

곧 예전에 복음을 들었다면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들림 받았을 만한 그래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물론 십사만 사천 명의 전도자들만큼 합당한 중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질 만한 선한 양심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도 긍휼히 여기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찍 순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며, 심한 고문이나 핍박의 환난을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비록 믿음이 연약하다 해도 이들에게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에게는 낙원이 처소로 주어집니다.

쭉정이 신자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7년 환난이 임하기 전에 이미 많은 구원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 기회를 잡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미 휴거가 끝난 상황에서 이들이 다시금 그들의 믿음을 인정받으려면 참혹한 고난을 참고 견딤으로 순교에 이르러야 공의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참혹한 고난 중에서 승리하고 믿음을 내보일 사람들이 쭉정이 신자들 중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 순교했다 해도 그들은 겨우 낙원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에 거하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해야 하는 것이고요.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 명씩 나오고 그 수를 다 합하면 십사만 사천이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란 육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런데 십사만 사천, 종들도 7년 환난 때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무리들이기에 이들을 영적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여기서 만 이천 명, 열두 지파 이렇게 12이라는 숫자가 계속 등장하는 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삼(3)’은 ‘합한 수’로서 온전함을 이룬다는 의미가 있지요. 하나님도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장사한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요나가 삼 일간 물고기의 뱃속에 있었던 것,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차례 시험 등이 다 ‘합한 수’인 삼(3)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4)는 고난의 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40년 연단이나, 애굽에서의 400년 포로 생활, 혹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처럼, 사(4)라는 숫자는 주로 고난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칠(7)’은 ‘완전수’이지요. 이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서 하나님께서도 6일 동안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도 일곱 영의 기준에 맞춰 주신다 했고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 앞에 나와 병을 치료받을 때도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지요.

다음으로 십이(12)는 빛의 수입니다. 요 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말씀했지요. 하루 24시간 중에 12시는 해가 중천에 있어서 가장 빛이 밝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 열두 진주문, 생명 나무의 열두 가지 실과 등에 바로 이 빛의 수인 십이(12)가 연관되어 있지요.

우리 주님은 참 빛이시며, 정오의 빛과 같이 가장 밝은 온전한 빛이십니다. 이러한 빛이 되신 주님께서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민족인 이스라엘 중에 보내셨습니다.

빛의 수인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지요. 또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인 것도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구원의 도가 전파되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처럼 마지막 7년 환난의 시점 가운데서 주님을 전파하게 될 하나님의 종들도 십이(12)라는 빛의 수에 맞추어 열두 지파 중에서 1만2천 명씩 택함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 십사만 사천 명을 세우시는 것인데 이처럼 많은 수를 전도자로 세우시는 것은 7년 환난 동안에는 그만큼 복음을 선포할 기간이 아주 짧기 때문이지요.

짧은 시간에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기에 십사만 사천 명이나 되는 전도자가 일시에 세움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본문에 보면 이들에 대해 그냥 열두 지파에서 각각 몇 명씩 총 몇 명이라고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이렇게 열두 지파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있지요. 더구나 이 이름들은 원래 야곱에게서 태어난 열두 아들들과는 그 이름과 순서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르우벤이 장자인데도 본문에는 유다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다섯째 아들 단의 지파가 빠지고 대신 므낫세 지파가 들어가 있지요. 여기서 단 지파가 빠진 이유에 대해서는 왕상 12:27-29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말씀하신 내용이 나오지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분열되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때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남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것을 막으려는 계획 하에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이것들을 신으로 섬기게 하지요.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때 금송아지를 둔 장소인 ‘단’이라는 곳이 바로 단 지파가 모여 살던 곳의 지명이지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단 지파는 ‘라이스’라는 성읍을 정복한 후에 그곳의 이름을 자신들의 조상인 ‘단’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단’이라 이름 붙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은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곳에 주류를 이루며 살던 단 지파의 사람들도 쉽게 우상숭배에 물들고 말았지요. 이렇게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된 ‘단’과 그곳에 살던 ‘단 지파’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단 지파에게는 이러한 큰 과오가 있었기에 계시록에 기록된 열두 지파 즉 구원의 섭리를 이루는 열두 지파 안에서는 단 지파의 이름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단 지파가 빠진 대신 므낫세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므낫세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아들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이에 대해서도 이미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창 48:5에 이스라엘 즉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했지요.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비록 이스라엘 즉 야곱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지만 그들을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과 같은 위치에 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안에서 단이 빠지고 므낫세가 대신 들어가는 것도 이미 오래전에 모든 것을 아시고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섭리 안에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통해 참 빛 되신 구세주 예수님이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 열둘 중에는 가룟 유다도 들어있었지요. 그래서 결국 배신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맛디아라는 제자가 이 열두 사도의 반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열둘 중에 합하지 않은 자가 빠지고 합한 자가 대신 들어가게 된 것도 경작의 역사 속에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이는 곧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이 아닌 이방인들 중에서도 구원의 은총 안에 들어오게 될 사람들이 있음을 예표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롬 11:17에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가지 얼마가 꺾여졌다는 것은 원래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자기 왕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못 박았기에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었음을 뜻하지요. 대신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의 뿌리 진액을 함께 받았다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을 뜻합니다.

열두 지파 중에 단 지파가 빠지고 대신 므낫세 지파가 들어갔으며, 열두 제자 중에서 유다가 빠지고 대신 맛디아가 들어간 것처럼 주를 부인하므로 이스라엘 중에 구원에서 빠지는 사람들이 있게 되며 그들을 대신하여 주를 영접한 이방인이 오히려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7년 환난 중에라도 최후의 한 영혼까지 더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섭리에 대해 설명했지요. 하물며 이처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7년 환난이 오기 전에는 얼마나 더 많은 구원의 기회를 주려고 하시겠습니까? 또한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수 있도록 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고후 6:2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신 말씀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지런히 신부 단장하심으로 신랑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공중에 오실 때 꼭 기쁨으로 함께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6-29 오전 10:51:28 Posted
2023-09-08 오후 11:43:4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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