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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45) 두 증인 [계 11:1-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8.05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사명을 맡았지요. 상상 못할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면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두 증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우리가 휴거되고 난 후입니다. 그러나 휴거가 있기 전부터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준비하게 되지요. 과연 이 두 증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또 7년 환난 때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지금부터 그 비밀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계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지팡이 같은 갈대’란 ‘믿음을 척량하는 도구’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권능을 행했던 것처럼 지팡이는 믿음과 능력을 상징하지요. 갈대는 줄기가 곧기 때문에 예전에는 길이를 재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계 21장에도 보면 금갈대로 새 예루살렘의 규모를 척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갈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한다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와 경배하는 자들의 믿음을 측정한다는 뜻이지요.

사람의 축복이나 재앙은 우연히 일어나거나 대충대충 적당히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과정을 사람이 다 알 수는 없지만 영계의 정확한 법칙에 따라 이뤄지지요. 기도하여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것도 철저히 공의에 따라 이뤄집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일곱 영의 측정이지요. 일곱 영의 측정 결과에 따라 응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구원이나 천국의 처소, 상급 등도 대충 정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단지 교회를 다닌다 해서 겉모습만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계 2:23에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지요. “주여, 주여”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들의 신앙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몰래 희생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열심히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죄 가운데 삽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각 사람의 중심과 마음과 행함을 자로 재듯이 정확하게 측정하십니다.

그 측정 결과에 따라 구원도, 처소도, 상급도 정확한 공의대로 결정되지요. 본문에 나오는 지팡이 같은 갈대도 믿음의 분량을 측정하며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도구입니다.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들림 받을지 땅에 남게 될지도 믿음의 정확한 측정에 따라 결정되지요.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이 순교할 때도 그들의 모든 것이 정확히 측정됩니다. 그중에는 중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서 의연하게 순교를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하든 구원을 받아야 할 텐데” 하면서 두려움에 떨며 가까스로 순교하는 사람도 있지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휴거를 보고 잠시 두려움에 회개한다 했지만 핍박과 회유를 받고는 이내 변질되기도 합니다. 이런 각각의 믿음과 행함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2절 전반 절에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에게 주셨다 했지요. 성전 밖 마당을 이방인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가 차기까지 적그리스도에게 전 세계를 주관해 갈 권세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7년 환난이 끝나고 나면 결국 적그리스도의 세력도 심판을 받지요.

하지만 7년 환난 중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특히 후 3년 반 동안에는 큰 권세를 내어주시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인간 경작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7년 환난 중에라도 적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에 이를 영혼들을 가려내시려는 것이지요.

2절 후반절에는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했습니다.
‘거룩한 성’이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마흔두 달은 곧 3년 반이지요. 이렇게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짓밟게 되면 원수 마귀는 아주 의기양양해집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것처럼 여기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니 악한 영들 역시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훼방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게 되지요. 마치 자신들의 승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시는 동안 원수 마귀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인간 경작을 통해 참 자녀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하셨다” 말하려는 것이지요. 선민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사주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죽이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도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구세주를 대적했고 결국 멸망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도 구원하지 못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실패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섭리가 원수 마귀 사단에 의해 무산되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7년 환난 중에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짓밟는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결국은 완전한 하나님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과정일 뿐이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며 그 계획이 이미 다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 포함된 것이 바로 오늘날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선교입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선교를 시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지요. 선민이라는 틀과 자부심 속에 단단히 굳어져서 복음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한 그들의 틀 속에도 미세한 빈틈은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있지만 영적인 의미를 다 깨우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들이 궁금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답답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 풀어 주셔야만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경건하고 진리에 갈급한 사람들은 이 성결의 말씀을 들을 때 시원함을 느낍니다. 이 말씀이 참임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씀을 확증하는 권능을 통해 이 말씀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뼈 속 깊이까지 굳어진 정통 유대인들이라 해도 그들 중에 선한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바로 두 증인도 있습니다.

이 두 증인을 통해 많은 열매들이 맺혀지게 됩니다. 이들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들을 수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많은 수가 바로 이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섭리이며 계획입니다.

이러한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짓밟도록 허락하시지요. “거룩한 성이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짓밟힌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심히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엄청난 권능을 가진 두 증인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보게 되지요. 이런 은혜가 거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미 경작의 문이 닫힌 7년 환난 때는 성령의 역사도 거두어진 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면 당연히 사단이 송사하게 되지요. “이스라엘만 그처럼 특별대우하시면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송사가 없으려면 합당한 공의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값을 치르는 방법이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거룩한 성을 3년 반 동안 내어주는 것이지요.

두 증인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사람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게 됩니다. 그냥 큰 권능을 보여 주어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증거로써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지요.

계 11:3-6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일천이백육십 일”을 계산하면 3년 반인데 이것이 꼭 후 3년 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두 증인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후 3년 반이 시작되기 조금 전부터입니다. 이들이 활동하는 기간 동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해칠 수가 없지요. 물론 이때는 적그리스도가 세상 권세를 잡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때입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 동안은 두 증인을 건드릴 수 없지요.

3절에 이들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 했습니다. 좋은 비단옷이나 부드러운 세마포가 아닌 뻣뻣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지요. 이는 그들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심히 애통하며 회개하거나 근신하며 자신을 겸비하게 하는 경우에 이처럼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 두 증인은 자신들이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들이 겸비하게 낮아져서 사역을 감당하지요. 사망으로 가는 자신들의 민족을 어떻게든 구해야겠다는 결연한 마음입니다.

굵은 베옷에는 이러한 의지가 담겨 있지요. 어둠으로 뒤덮인 7년 환난의 기간 동안 이들은 영적인 전쟁터의 한 복판에 서게 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잠자리, 부귀나 명예, 이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지요. 온 힘을 다해, 생명을 걸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굳은 각오와 의지로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감당하는 것을 굵은 베옷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요.

다음으로 이들에 대해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 말한 것은 그들의 출신과 사역을 의미합니다. 롬 11장에 보면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을 “참 감람나무”에 비유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들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라 한 것도 이들이 이스라엘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구약 성경 슥 4장에도 보면 두 감람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슥 4:14에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했지요. 물론 스가랴서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가 두 증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감람나무”라는 표현에 하나님의 도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촛대의 의미에 대해서는 예전에 일곱 교회의 말씀에서 설명했습니다. 곧 두 증인이 촛대처럼 빛을 발하여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사역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빛 되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지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이스라엘에 구원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

다음으로 누가 두 증인을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했습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서 원수를 소멸한다 했지요. 이는 바로 두 증인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음을 말합니다. 물론 모든 축복과 저주의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 권세를 합당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주셔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행 13장에 보면 엘루마라는 박수, 곧 남자 무당이 사도 바울에게 저주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전도를 하는데 박수 엘루마가 바울을 훼방하기 위해 힘쓰지요. 이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바울이 그에게 선포합니다.

행 13:10-11에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했습니다.

이를 본 총독이 심히 기이하게 여기며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장받는 사람은 그 입술에 축복도 저주도 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두 증인에게도 이러한 권세가 있으므로 누구도 그들을 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두 증인에게는 하늘을 열고 닫는 권세도 있다 했습니다. 아합 왕의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가 예언하자 온 이스라엘에 3년 반의 가뭄이 들었지요. 그런 것처럼 두 증인에게도 하늘을 닫아 비 오지 못하게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열 재앙처럼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도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이 땅에 나타내지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7년 환난 동안 권세를 잡은 적그리스도도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두 증인에 대해서는 머리털 하나 상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선한 자들은 이제 그들의 말을 듣고 그 권능을 보며 믿음을 갖게 되지요. 비록 성령의 시대, 은혜의 시대는 끝났지만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또다시 긍휼을 입게 됩니다. 두 증인에게는 저주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축복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닫을 수 있다면 반대로 열 수도 있습니다. 마실 물을 피로 바꿀 수 있다면 먹지 못할 물을 식수로 바꿀 수도 있고요.

극심한 재앙 속에서도 두 증인을 믿고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도 두 증인에 대해 알게 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권능을 본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강퍅해진 세대이기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오늘날도 동일하게 그러지 않습니까? 아무리 놀라운 권능을 보았다 해도 돌아서면 금세 의심이 틈탑니다. 보고 믿는다 해도 핍박이 오면 금세 마음을 변개해 버리게 되고요. 성령 시대에는 성령께서 도와주셨지만 이때는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도, 믿음을 지키는 것도 쉽지가 않지요.

그마나 이스라엘 민족은 중심이 곧으므로 비교적 많은 수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중심을 아시므로 특별히 이스라엘 가운데 두 증인을 섭리해 두신 것이지요. 이처럼 놀라운 권능으로 사역하던 두 증인은 “일천이백육십 일”의 때가 차면 순교하게 됩니다.

두 증인의 권능이 크면 클수록 더욱 위협을 느끼며 그들을 미워하지요. 자신들이 권세잡고 있는 사회를 어지럽히며 혼란케 하는 세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두 증인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게 되지요.

두 증인을 아무리 죽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3년 반 동안은 그들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하여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증거를 마칠 때”가 옵니다. 두 증인을 통해 구원받는 수가 다 채워지면 그들의 사역을 마치게 되지요.

계 11:7에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두 증인이 사역을 시작한 지 3년 반이 지나면 섭리 가운데 순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도 그러했지요. 반대하는 자들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죽이려 했으나 때가 이르기까지는 손도 대지 못했지요. 그러나 때가 차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두 증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가 되어야 적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 상황을 “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핍박이 가해지지요. 두 증인을 돕거나 비호하는 사람들까지 색출하여 진멸하고자 합니다. 사회적으로 심히 위협적인 존재들이므로 두 증인에 의한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지요.

그들의 흔적까지 완전히 없애버려야 자신들의 체제가 안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증인은 어떻게 순교하게 될까요? 적그리스도는 두 증인을 너무나 미워했기 때문에 죽여도 쉽게 죽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영감 중에 알려 주셨지요.

이들이 순교할 때 받는 고통을 알게 되면 그 중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두 증인을 같이 묶어서 독가스로 고문하다가 죽입니다. 이 독가스는 전쟁을 위해 개발한 무기 중에 하나이지요. 단 몇 분 안에 많은 인명을 학살할 수 있는 너무나 위협적인 무기입니다.

그러나 고문할 때는 가스의 농도를 조절하여 죽지 않고 극심한 고통만 받게 할 수 있지요.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데모가 한창일 때 최루탄 가스를 경험해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큰 고통을 주지요. 이 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심한 기침과 함께 눈물, 콧물을 흘리고 구토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화생방 훈련이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가스에 노출시키는 훈련을 하지요.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고통을 “마치 죽을 것 같다”고 표현하며 진저리까지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문할 때 쓰는 가스는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요.

가스의 농도를 강하게 할 때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오장육부가 터지는 듯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까지 줄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이처럼 두 증인에게 최대로 모진 고통을 주면서 그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지요.

독가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떤 가스는 피부에 수포가 생기고 참혹한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눈이 멀거나 폐에서 피를 토하기도 하지요. 두 증인에게 사용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신경이나 근육 등에 작용하는 가스입니다. 겉으로는 외상이 없게 하지요. 이는 나중에 세상에 본보기가 되도록 시체를 공개할 때도 자신들의 잔혹함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두 증인은 잡힐 때도, 그리고 고문당하다가 순교할 때까지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묵묵히 끌려가신 것처럼 그들도 때가 된 것을 알고 조용히 잡혀가지요. 예수님께서 모진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실 때 잠잠하셨던 것처럼 그들도 잠잠히 죽음을 맞습니다. 참혹한 고문을 당할 때에 한마디 저항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두 증인을 죽이고 나면 두 증인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습니다.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던 자들이 이렇게 죽었다” 하며 그 시신을 세상에 공개하지요. 옛날에 반역자나 큰 죄인들을 처형하면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높은 곳에 매달거나 버려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이지요.

전쟁 시에도 적군의 대장을 죽이면 그 시신을 매달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승리를 자축하는 동시에 적군을 위협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처럼 두 증인의 시신을 공개하여 두 증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을 위협하려는 것입니다.

계 11:8에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큰 성 길에 시체가 있다”는 것은 두 증인의 죽음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보도록 공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성을 “소돔” 혹은 “애굽”이라 한다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소돔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극한 방탕과 쾌락의 도시요, 결국 불의 심판으로 멸망당한 도시입니다. 애굽은 열 재앙의 큰 권능을 보고도 회개치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한 나라이지요.

악한 사람들이 두 증인의 권능을 보고도 애굽처럼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고, 소돔처럼 죄가 관영하여 심판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외면당하고 죽임 당하신 것처럼 두 증인도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지요.

계 11:9-10에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적그리스도는 두 증인을 잡아 죽임으로 이제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불안 요소가 제거되고 자신들의 권세가 안정되었다고 안심하는 것이지요.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라는 것은 온 세계에 자신들의 승리를 공포한다는 뜻입니다. 두 증인이 얼마나 불순한 세력이었는지 홍보하며 이들이 죽었으니 이제 불안한 삶이 그쳤다 말하지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적그리스도와 그에 동조하는 모든 세력들을 말합니다. 서로 예물을 보낼 정도로 기뻐한다는 것은 당시에 두 증인이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줍니다. 악한 자들이 두 증인으로 인해 얼마나 위협을 느끼며 고민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이렇게 미워하던 두 증인의 죽음을 자축하고 있는데 또다시 너무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계 11:11에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적그리스도는 두 증인을 참혹하게 고문하다가 결국은 확실하게 죽였고 그 시체까지 세상 앞에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3일 반이나 지난 후에 그 시체가 갑자기 살아서 일어난 것입니다.

계 11:12에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우리 주님의 부활, 승천하심과 같이 두 증인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것이지요. 이때 살아난 시점이 3일 반 후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주는 증거입니다.
곧 두 증인이 3년 반의 사역 후에 잡힌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힘이 있어서 그들의 뜻대로 두 증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이 되어 두 증인이 죽임 당한 것임을 나타내지요.

그리고 시신을 장사하지 않고 길에 둔다는 것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두 증인의 시신을 세상 모두가 볼 수 있게 두는 것은 자기들의 승리를 나타내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 증인의 부활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적그리스도가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뜻대로 일을 행해 나가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한 두 증인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육의 눈으로도 볼 수 있지요.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한 대로 두 증인을 죽인 적그리스도와 그 추종자들도 이 모든 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찌하든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며 소문이 더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또다시 핍박을 시작하지요. 선한 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보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권능을 보여 주고 기적을 보여 주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사단이 그 마음을 주관하여 눈과 귀를 철저히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사실을 은폐하려 해도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계속 퍼져나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며 두려워 떨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본 후에는 담대함을 가졌지요. 이런 것처럼 두 증인의 부활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계 11:13에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두 증인이 죽임 당했던 그 장소를 중심으로 큰 지진이 일어나 황폐해집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당시와 비슷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을 때도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등 지진이 일어났지요. 마 27:54에 보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에 두 증인이 승천할 때의 지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이지요. 적그리스도는 이 지진에 대해서도 언론 매체를 통제하는 등 어찌하든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증인의 부활 승천과 지진을 현장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양심이 비교적 선한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요.

물론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고, 믿는다 해도 핍박이 두려워서 결국 주를 부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끝까지 적그리스도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두 증인은 믿음이 없어서 휴거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지만 순교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들은 유대교를 굳게 신봉하는 사람들로서 오랜 동안 진리에 대해 갈급해 왔습니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고뇌 속에 있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권능을 보게 되고, 자신들의 고뇌에 대한 답을 얻게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온 세상의 구세주요,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약에만 집착하고 있는 자기 민족에게 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게 되지요. 그러니 지옥 같은 7년 환난의 소용돌이 속에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 땅에 남은 그 영혼들을 어찌하든 하나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굶주린 사자 굴에 들어간 것과 같은 적그리스도의 세력권 안에서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하지요.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 들림 받게 됩니다. 이제 이들의 마음에는 아무 후회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마쳤지요.

먼저 휴거된 성도들의 대열에 동참하여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들의 사역을 지켜보신 주님께서도 얼마나 반갑게 이들을 환대해 주시겠습니까? 뭇 천군 천사와 성도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원한 영광을 누릴 일만 남았지요. 하지만 이때도 두 증인의 마음에는 기쁨과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기 백성들을 생각하므로 마음 한편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하지요. 끝까지 그들을 마음에 품으며 들림 받습니다. 이때 어찌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의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 당부의 말 중 하나를 잠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후에 있을 모든 일들을 인하여서 두려워 떨지 말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이 일을 기억하라.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은 참이요 보였던 모든 것들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라. 이와 같이 형제, 자매들이 믿어온 것들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동안 많은 것으로 증거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우리가 구원을 얻음이라.

이같이 7년 환난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 마음에 변개치 아니하고 “주는 우리 그리스도시요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고백을 이루며 우리가 행하고 증거했던 모든 말이 참임을 믿고 의지하라. 그리하여 이제 이후에 있을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속히 일을 이뤄가기 원함이라.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깨우친 자들이 있으므로 그들과 더불어 앞으로의 날들 속에 믿음으로 잘 이겨나가서 주실 것을 바라보며 온전함으로 달려갈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되어주기를 원함이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 속에서 이곳을 떠나 아름다운 곳에 올라가나 여기 남아 숨을 쉬고 호흡하는 동안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잊지 말라.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이 민족을 통하여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그 말씀을 잊지 말라. 그 약속을 잊지 말라. 또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라.

그래서 앞으로의 날들 속에 모든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 마음을 지켜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켜 드리며 하나라도 더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형제, 자매들이 되기를 원함이나니 우리의 이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원함이라. 그동안에 말을 이루었던 모든 말씀을 기억하며 이 환난 속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훗날에 우리가 함께 이르렀을 때에 기쁨으로 맞이하기를 원함이라”

어찌하든 남겨진 자기 민족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심정이 잘 담겨 있지요.
또 다른 증인은 이러한 당부를 남깁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들이 정녕 진실이요 참된 것임이라.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함으로 이 말씀을 전했고 그처럼 많은 권능들을 행했던 것이라. 우리의 했던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일들이었고, 형제와 자매들이 보는 지금의 현상을 통해 진실을 깨달을 수 있기 원함이라.

우리가 했던 이 모든 일들을 기억하라. 우리가 했던 이 모든 일들을 기억하라. 우리가 죽었으되 다시금 살아난 이 일을 기억하라. 우리가 죽은 것 같고 핍박과 고난 받는 것 같았으되 그러나 이제 아버지 품으로 옮기는 이와 같은 것을 봄으로 인해서도 이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이것을 보고 목도한 자들은 가서 전하라.

그러므로 하나라도 더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정녕 하나라도 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설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 주기를 바람이라. 우리는 떠나나 그 진실을 왜곡하지 말며 모든 목도한 바를 입을 열어 증거 하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 정녕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심과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우침으로 인하여서 많은 이들이 구원의 도에 동참하기를 원함이라”

두 증인은 자기 민족이 자신들의 행함을 기억하여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간절히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마친 후 두 증인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벌어지는 7년 혼인잔치에 동참하게 되지요. 이 땅에서는 재앙도 더 심해지며 구원을 위한 영적 전쟁도 더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모든 예언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은 장차 되어질 마지막 때의 일들이지요. 이 말씀들도 반드시 그대로 이뤄집니다. 앞으로 드러날 두 증인의 소식을 통해서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깨닫고 느낄 뿐 아니라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하지요.

장차 여러분은 어느 쪽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가 두 증인을 환영하는 쪽에 있겠습니까? 땅에 남아서 두 증인이 들림 받는 것을 올려다보는 쪽에 있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살전 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지요. 이 말씀대로 이뤄질 날이 가깝습니다.

더 이상 세상 정욕을 취하지 말고 부지런히 죄와 싸워 버리며 온 집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날에 여러분 모두가 담대히 일어나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8-10 오후 6:13:58 Posted
2023-08-25 오후 4:32:5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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