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전체보기(날짜별)

제목
순전 (1)  [마 12:19-21]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4.06.23
오늘부터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가장 순전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순전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언 30장 5절 전반 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했습니다. 순전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전적으로 순전이란, ‘순수하고 완전함’을 말하며 ‘순전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욥에 대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이때의 욥은 중심의 악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행위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등의 많은 덕행이 있었지요. 그러니 성령 시대가 아닌 구약 시대의 사람 중에서는 그래도 순전하다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전함의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행함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의 악도 버린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마음, 이 마음도 순수하기는 하지만 완전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성결한 마음 안에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 진리와 깊은 선과 사랑을 온전히 채울 때 ‘완전하다’ 할 수 있지요.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런 순수함과 완전함을 모두 갖춘 모습입니다.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분들이지요. 그런데 이들보다 더 순전한, 가장 순전하신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순전함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바로 본문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만 온전히 양식 삼아도 참으로 순전한 사람, 곧 온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다툼이 없으셨으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화평 속에 이루셨습니다. 육으로도 선한 부모의 양육을 받으셨고, 어릴 적부터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셨지요.
공생애 기간에도 천국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온갖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심으로 삶의 새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선한 일만 하셨는데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며 어찌하든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였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과 율법 학자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참 빛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3:20). 그래서 어찌하든 올무를 잡고자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했지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면서도 결코 그들을 미운 감정이나 불편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선하고 지혜로운 말씀을 일러 주실 뿐이었지요. 그래도 그들이 깨우치지 못할 때는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으셨고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유대 병정들에게 잡히신 후 법정에서 심문받으실 때도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론도,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으셨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몇 마디 하신 것 외에는 변론하실 기회가 주어져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아무와도 다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사단 마귀의 사주를 받아 무죄한 예수님을 정죄하며 해를 가하고, 어찌하면 잡아 죽이려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상대가 여러분에게 어떤 해를 가한 것도 아니요, 애매히 곤경에 처하게 한 것도 아닌데 단지 내 마음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상대와 의견과 생각이 다르면 부딪치고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나 변론하거나 다투는 분은 안 계시는지요? 몇 번은 참지만 반복되는 애매한 일은 다투시지 않나요? ‘이 사람만큼은, 이 일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거나 ‘내가 부딪쳐서라도 상대의 옳지 않음을 깨우쳐 주어야겠다.’ 생각하신 적은 없나요?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가 깨우치고 돌이킨다면 좋겠는데 그리 아니했을 때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화평이 깨지고 오히려 감정이 더 쌓여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주님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가르쳐서 그들이 이해하고 회개하며 돌이킬 수 있었다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해 봐야 변론밖에 되지 않을 터이니 차라리 피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꼭 혈기를 내고 언성을 높이는 것만이 다툼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마음속에서라도 나와 맞지 않는 상대를 못마땅해하고 나의 의를 주장하는 자세를 갖는 것 또한 다툼이 있는 것이지요. 의견이 다른 상대와 변론하거나 다투지는 않으나 그에 대한 불편함을 주변에 말하는 것도 마음에 다툼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마음 안의 평화가 깨졌고 결국 모든 사람과 화평을 좇으라는 말씀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이러한 마음의 다툼-불편함, 자기 의가 있다면 그 다툼의 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아직 불편함을 갖는 악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 악을 뽑아내 버려야 하지요. 누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 아니요, 여러분의 마음에 맞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상대를 품지 못하는 작은 그릇이요, 부딪치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틀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연단을 통해, 나와 다른 상대를 통해, 사명을 감당하며 악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사에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보고 발견하며 작은 비진리도 용납하지 않고 벗어나간다면 예수님처럼 순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도 없지요. 내게 부딪쳐 오는 사람을 오히려 포근하고 따뜻하게 감싸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항상 평화가 있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마음에 이미 천국이 임해 있으니, 누구를 만나도 행복하고 항상 기쁨이 넘치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런 여러분을 사랑하사 만일 여러분이 애매히 어려움을 당하면 역사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편이 되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들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곧 ‘나는 이런 사람이다’ 스스로 자부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그만한 대접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무수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면서도 전혀 들레지 않고 겸손히 행하셨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만 돌리셨지요(요 17:4). 다만 때때로 예수님 자신이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은 이 사실을 사람들이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과 따르는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자기 악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며 비방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방과 핍박을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이 온전한 구세주가 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에 창조의 역사도 아버지와 함께 이루신 예수님께서 한낱 피조물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감사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없는 모습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의 조롱에도(마 27:42~43)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기에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춰 순종하면 자신이 들레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원수 마귀 사단,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순종할 수밖에 없지요(빌 2:9~10). 순전하신 주님의 순종이 그런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질병 균이라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명할 때 치료되는 것 또한 주님의 이름 앞에 모든 어둠이라도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명해도 나가지 않는 경우는 무슨 이유일까요?
공의에 의해서 기도하거나 기도 받는 사람이 하나님 법칙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 원수 마귀에게 영원토록 흙을 먹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먹고 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 계명을 어긴 사람, 악을 행하며 불법, 죄를 지은 사람들을 원수 마귀가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질병, 재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녕 빛 가운데 살 때는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요일 5:18). 우리에게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구하고 그리하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요(요한일서 3:21~22). 따라서 죄를 짓고 어두움 가운데 살았다면 통회자복해서 하나님과의 죄의 담을 헐고 나와야 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기도 받을 때 원수 마귀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했지요(빌 2:1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뜻에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이처럼 큰 영광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일을 이룰 때 예수님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 안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고 그 공로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또 자신이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힘들어하고 서운해하기도 하지요. 누가복음 14장 11절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고, 고린도후서 10장 18절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때 그것이 참입니다. 그때도 중심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초신자 때는 작은 것을 응답받아도 역사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큰 사명을 감당할수록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얻으려는 마음이 드러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의 은혜로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한편에서는 “나도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에 이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었다.”라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혹여 이런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과 주님만 있는 영의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크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로 많은 영광을 돌렸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했으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고전 15:10). 이처럼 여러분도 순전한 마음으로 영광 돌리심으로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영광을 구해 주시며 높여 주시길 바랍니다. 또 주님의 순전하심과 같이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름다운 신부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06-20 오후 4:39:12 Posted
2024-06-28 오전 10:13:40 Updated

다음 글
이전 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