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 (16) 영적인 존재들 (5) [창 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4.06.14
창세기 강해 열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룹의 일반적인 특징과 대표적인 그룹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룹들은 주로 호위와 경계의 역할을 하며 체계와 질서가 매우 잘 잡혀 있지요. 용과 네 생물은 그룹의 머리급들로서 늘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은 루시퍼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영이 되어 버렸지요. 따라서 지금은 네 생물이 그룹의 최고 머리입니다.

이 시간은 네 생물의 모습과 사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 이래 지금까지 네 생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도 에스겔 선지자와 사도 요한만이 네 생물을 정확하게 보고 기록을 했지요. 그만큼 네 생물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 해도 전부가 네 생물을 보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네 생물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은 영안이 열려 네 생물을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네 생물은 일반 천사나 천군과 달리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여 무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색깔도 밝고 환한 것이 아니라 조금 어둡고 진한 색상을 띠고 있지요. 또한 절대 웃지 않으며 항상 근엄한 표정이므로 보는 이도 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생물을 처음 보는 사람 중에서는 네 생물을 악한 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입니다. 네 생물을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네 생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풀어 설명한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지요.

에스겔 선지자는 네 생물을 보고 기록은 했지만 왜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지 영적인 의미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 선지자가 네 생물에 대해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합당한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네 생물뿐만 아니라 영계의 비밀한 것들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앞으로 될 일들도 밝히 계시해 주셨지요. 마음이 선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영안이 밝히 열릴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도 보고 앞으로 될 일들까지도 계시받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 참 드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만 있다면 영의 세계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려 주고 보여 주기 원하시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본 제단에는 많은 분들이 영안이 열려서 영의 세계를 봅니다. 제가 설명하는 영의 세계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확인해 주고 있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네 생물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생물에 대한 기록은 에스겔 1장과 10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4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 중에서 에스겔 1장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의 기록으로 보충하겠습니다.

먼저 에스겔 1장 4절에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했지요. 이 장면은 에스겔 선지자가 네 생물을 멀리서 보고 기록한 장면입니다. 네 생물이 다가오는 장면이 마치 폭풍과 큰 구름이 밀려오는 것처럼 보였지요. 네 생물이 대단한 기세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네 생물은 매우 큰 권세를 가졌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폭풍을 일으키거나 소멸시키는 등 천기를 움직이는 권세도 네 생물에게 있지요.
다음으로 네 생물에게서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였다 했습니다. 단 쇠란 높은 열에 달아서 뜨거워진 쇠이지요. 네 생물이 이러한 단 쇠처럼 보였다는 것은 네 생물의 역할이 하나의 무기와 같음을 의미합니다. 네 생물의 전체적인 느낌은 강하고 단단한 검과 방패 같습니다.

다음으로 에스겔 1장 5절에 보면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했습니다. 네 생물의 형상이 사람의 형상이라 했는데 이는 네 생물의 기본 체형이 머리, 몸통, 다리를 가진 사람과 비슷한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기본 체형만 사람과 닮았을 뿐 실제 모습을 보면 매우 다릅니다.
이어지는 6절에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한 대로 네 생물은 각각이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날개를 가졌습니다.
7절에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같이 빛나며" 한 대로 네 생물의 발도 사람의 발과 다르지요.
또 8절에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한 대로 각각 사람의 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손들은 몸통에 바로 붙어 있습니다. 사람은 몸통에 팔이 있고 팔 끝에 손이 있는데, 네 생물은 팔이 없고 날개 아래쪽 몸통에 바로 손이 있지요.
다음으로 에스겔 1장 9절에 보면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했습니다. 이는 네 생물의 독특한 움직임을 설명합니다.

네 생물은 하나로 뭉쳐 있다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가려면 각각 앞 방향으로 쫙 흩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다시 뭉치기 위해 돌아올 때는 뒤로 돌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요.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처럼 네 생물이 합체될 위치로 정확하게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네 생물이 얼굴을 네 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하나씩 얼굴이 있지요. 우리 사람은 얼굴이 정면에 하나 있기 때문에 뒷걸음을 치려면 좌우도 살피고 뒤도 돌아보아야 하지요. 그러나 네 생물은 사방에 얼굴이 하나씩 있기 때문에 뒤로 가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지는 10절에 그 네 얼굴의 모양이 나옵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했습니다. 한 생물 당 얼굴이 네 개씩인데 그 네 얼굴의 모습이 각각 다르지요.
사람 얼굴부터 시작한다면, 반 시계방향으로 오른쪽은 사자 얼굴, 다음은 독수리 얼굴, 다음은 소의 얼굴이 나옵니다. 네 생물 모두, 이러한 순서는 동일합니다. 이렇게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생물이 총 넷인데 이를 총칭하여 네 생물이라 하지요.

그러면 네 생물의 얼굴은 전부 몇 개일까요? 한 생물에 얼굴 네 개씩이므로 네 생물의 얼굴은 전부 열여섯이지요. 얼굴이 넷이지, 머리가 넷은 아닙니다. 한 생물 당 머리는 하나뿐이고, 머리의 사방으로 네 가지 얼굴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네 생물 각각에게는 그 생물을 대표하는 얼굴이 있습니다. 네 생물은 각각 고유한 사명을 갖고 있어서 흩어질 때도 있지만 보통은 하나로 뭉쳐 있지요. 마치 네 사람이 등을 마주 하고 팔짱을 낀 채 얼굴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을 향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네 사람의 등이 마주한 가운데는 빈 공간이 생길 것입니다. 이처럼 네 생물이 하나로 뭉쳐 있을 때 각각 바깥쪽을 향한 얼굴이 그 생물을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또한 한 생물 안에서도 대표 얼굴은 나머지 얼굴들보다 상대적으로 큰 편이지요. 만일 하나로 뭉친 네 생물을 보았는데 정면에 보이는 얼굴이 사자였다면 그것은 사자 생물입니다. 사자 생물은 사자의 얼굴 외에 세 개의 얼굴이 더 있지만 막상 영안이 열려 사자 생물을 본다면 사자의 얼굴만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은 고개를 돌린다거나 뒤로 돌지를 않기 때문에 정면의 얼굴만 보입니다.

이제 에스겔 1장 11절을 보면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했습니다. 앞서 네 생물은 날개가 네 개씩 있다 했지요. 그리고 네 생물이 하나로 뭉쳐 있을 때에 두 날개는 펴서 옆 생물의 날개와 닿게 하고 두 날개는 몸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장 8절에는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네 생물을 잘못 보았거나 잘못 기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로 뭉친 네 생물을 보았고 그때 네 생물의 날개가 여섯 개로 보였지요. 반면 에스겔 선지자는 네 생물이 흩어졌다 모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네 생물 각각의 날개 수를 더 정확히 볼 수 있었지요.
따라서 네 생물의 날개는 각각 네 개인데 네 생물이 뭉쳤을 때는 여섯 개로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네 생물이 하나로 뭉쳐 있을 때에 보면 날개의 수가 많아 보이지요. 또한 각각의 생물들이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날개가 서로 포개지면 날개 수는 적어 보일 것이고 포개지지 않으면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와는 다른 요한계시록의 기록으로 인해 우리는 네 생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은 성경에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발견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과 저곳의 기록이 다르니 성경에 오류가 있다"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절대 참이며 다르게 기록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사복음서에도 이런 부분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좌우편에 달린 강도들에 대한 내용이 복음서에 따라 약간 다릅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과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좌우편의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한 강도만 예수님을 욕했고, 다른 강도는 오히려 그 강도를 꾸짖었다 했지요. 그리고 욕하지 않은 이 강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카메라가 없었기에 글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복음서에 각각 다르게 기록됨으로 인해 우리는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유추할 수 있지요.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므로 로마 병사들은 군중이 밀려들지 못하도록 창과 방패를 들고 막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반원형으로 둘러선 장면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십자가 주변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또한 많은 군중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을 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소란한 가운데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욕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편 사람들이 그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강도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욕한 강도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니 반대편의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사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욕한 강도 쪽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마치 중앙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여겨졌지요.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반면 누가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한 강도를 꾸짖었던 것이고, 회개하여 구원까지 받았다고 기록 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른 위치에 있었던 기자들로 인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더욱 정확하고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정확히 분별하도록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 말씀이며 결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틀리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네 생물에 대한 기록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생물이 어떤 모습일 때 보았으며 어떤 각도에서,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록이 차이 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계속해서 네 생물에 대한 에스겔서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장 13~14절에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같이 빠르더라" 했습니다. 하나로 뭉친 네 생물 가운데에는 약간의 빈 공간이 있다 했지요. 그 공간 안에는 번개처럼 번쩍번쩍 빛이 나는 불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네 생물은 번개같이 빠르게 움직이지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빠른 것입니다.
전광석화란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거리는 것과 같이 매우 짧은 시간이나 매우 재빠른 움직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가운데 불이 있어서 횃불 같은 네 생물이 이처럼 빠르게 움직일 때는 철의 소리 같은 불의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납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쥐불놀이를 해 보신 분들은 활활 타고 있는 불을 빠르게 돌릴 때 획획 하는 소리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네 생물이 움직일 때는 사방을 진동시킬 만큼 큰 소리가 나지요. 영안이 열리고 영의 귀도 열린 사람이 처음 이 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엄청나게 큰 천둥소리를 들은 것처럼 매우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에스겔 1장 15~21절에 보면 이처럼 네 생물이 움직일 때에 네 생물의 사방에 있는 바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했습니다.
네 생물 곁에는 사방으로 같은 모양의 바퀴가 하나씩 있는데 그 바퀴 가운데에는 생물의 신이 있다 했지요. 이 신이 행하면 생물도 바퀴도 행하고 이 신이 그치면 생물도 바퀴도 그쳤습니다. 결국 네 생물과 바퀴를 움직이는 주체는 이 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지요. 네 생물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이를 나타내는 인장과 같은 것이 바퀴 안에 찍혀 있습니다. 예전에 왕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보면 그것이 왕의 뜻임을 알 수 있었던 것과 같지요.
네 생물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네 생물을 주로 조종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네 생물은 그대로 움직입니다. 네 생물은 그 인장의 주인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에만 순종하지요. 이 근본의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로는 아무리 명령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서열의 천사장이 명령해도 네 생물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미가엘 천사장에게 "네 생물에게 명하라"고 하셔서 미가엘 천사장이 명한다 해도 네 생물은 순종하지 않지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에만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네 생물이 근본의 소리를 듣는 통로 곧 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바퀴입니다. 또한 이 바퀴는 네 생물의 주체인 신이 있는 공간을 형상화한 것이지요. 네 생물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데 근본의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근본의 소리가 울리는 공간을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으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신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네 생물의 주체가 누구이며, 네 생물이 그 주체에게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 운전을 할 때 핸들을 잡은 사람이 자동차를 움직이는 주체입니다. 이 운전자가 핸들을 움직이면 자동차의 네 바퀴도 그에 따라 움직이지요. 이때 자동차의 네 바퀴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움직입니다.
네 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퀴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따라 네 생물이 동일하게 움직이지요. 이를 두고 네 생물 곁에 있는 네 바퀴 모양이 한결같은 구조와 형상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로 어떤 명을 내리시면 네 생물은 즉각 순종하여 하나처럼 움직여서 명령을 이행합니다.

이러한 네 생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온몸에 눈이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10장 12절에 보면 "그 온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네 생물은 온몸에 눈이 있으며, 등에도, 손에도, 날개에도, 바퀴와 바퀴 둘레에도 눈이 가득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6절과 8절에도 기록되기를 각각 네 생물의 앞과 뒤와 날개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다 했지요. 이처럼 네 생물에게 눈이 많은 것은 모든 것을 두루 감찰하는 네 생물의 사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 생물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동안 그 누구도 밝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제단에서 이처럼 밝히 네 생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세계를 이루는 우리 제단의 사명과 네 생물의 활약이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이상 기후로 인한 천재지변은 빈번히 나타나며 자연재해도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네 생물의 활동과도 관련이 있지요. 그래서 만일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네 생물을 움직일 수 있다면 천재지변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영계의 깊은 비밀까지 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영으로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다니엘서 12장 10절에는 마지막 때의 영의 흐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영과 육은 흑과 백이 갈리는 것처럼 갈리는데 성도님들은 어느 편에 서시겠는지요? 놀라운 권능의 역사를 보고 체험하며 깊은 영계의 비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악을 행하거나 육에 거하면 안 됩니다.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셔야 하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해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06-13 오후 3:25:34 Posted
2024-06-15 오전 2:51:21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 (17) 이전글
이전 글 창세기 강해 (15)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