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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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5
제15과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
히 12:14
읽을말씀 : 히 12:14 | 외울말씀 : 히 12:14
교육목표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않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불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권세가 있다 해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범사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화평의 열매가 있고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지요. 또한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모든 것에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와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 때에 과중했던 세금과 노역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여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이른 악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좇지 않고 악한 말에 동조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결국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을 모략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로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여 다니엘을 없애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밥이 되고 말았지요. 큰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니 엄청난 화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분야 분야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일터나 사업터 등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도 화평함의 분야에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함을 입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화평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의를 이룬 만큼 기본적인 화평함은 당연히 임해 가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 곧 큰 그릇이 되기 위한 화평함을 소유해야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윗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의 어떤 잘못을 개선하도록 충언을 드린다면 어떤 방법을 좇아야 할까요? 임금을 개인적으로 찾아 뵙거나 서신을 통해 임금이 깨우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의가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임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면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할지라도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너무나 민망할 것입니다. 즉 그 의가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예를 갖추지 못하면 임금에게 누(累)가 되니 옳지 못하지요.
가정에서나 이웃간에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의 의견이 옳다 해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큰 그릇일수록, 큰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일꾼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질서 가운데 상대에게 민망함을 주지 않고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옳은 중심을 가지고 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화평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면 육적인 의로 끝나고 맙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의 의를 많이 이룬 사람일지라도 더 깊은 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분야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개선해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원수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의 가운데 행해 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의 감정을 유발시켰을 때에는 일부러 원수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수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무슨 원수 맺은 일이 있어서 사자굴이나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엘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그를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다니엘에게서 어떠한 허물이나 흠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계략을 꾸며 원수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상대의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걸고 넘어짐으로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에 의를 이룬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원수 맺어진 상황에서 어려움을 대처하고 풀어 나가는 데는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만큼 악이 없었으나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이 악한 이들의 악을 담대하게 지적하고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요 결코 잘못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써 악한 사람들의 궤계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언행이 온전하시니 누구에게든지 흠 잡힐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되 주위의 모든 환경을 고요하게 평정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나 행동이 온전치 못한 분야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려지는 문제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진정한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상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않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무시당하는 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시하는 마음은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임금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신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러하지요. 그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삶의 여정들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대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하는 등 심히 패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함으로 강국이었던 바벨론과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하룻밤만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를 두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의롭고 자기 보기에 옳은 견해를 내세워 주장하며 억지로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상대편에서는 자기 의견이 묵살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 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지 못한 것이지요.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상적인 사람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하게 느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고 설령 현저히 무시당했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악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만큼 고통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약자 편에서는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먼저 된 사람이 그 사정을 헤아려 주고 더 신중히 행하여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 편보다 더 낫게 여기다 보면 가르치려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을 듣는 상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깨우침을 주고자 할 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려 주기 위하여 설명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음에서 온전히 빼내 버리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모든 언행을 온전케 하여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않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불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권세가 있다 해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범사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화평의 열매가 있고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지요. 또한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모든 것에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와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 때에 과중했던 세금과 노역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여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이른 악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좇지 않고 악한 말에 동조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결국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을 모략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로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여 다니엘을 없애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밥이 되고 말았지요. 큰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니 엄청난 화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분야 분야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일터나 사업터 등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도 화평함의 분야에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함을 입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화평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의를 이룬 만큼 기본적인 화평함은 당연히 임해 가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 곧 큰 그릇이 되기 위한 화평함을 소유해야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윗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의 어떤 잘못을 개선하도록 충언을 드린다면 어떤 방법을 좇아야 할까요? 임금을 개인적으로 찾아 뵙거나 서신을 통해 임금이 깨우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의가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임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면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할지라도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너무나 민망할 것입니다. 즉 그 의가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예를 갖추지 못하면 임금에게 누(累)가 되니 옳지 못하지요.
가정에서나 이웃간에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의 의견이 옳다 해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큰 그릇일수록, 큰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일꾼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질서 가운데 상대에게 민망함을 주지 않고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옳은 중심을 가지고 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화평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면 육적인 의로 끝나고 맙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의 의를 많이 이룬 사람일지라도 더 깊은 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분야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개선해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원수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의 가운데 행해 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의 감정을 유발시켰을 때에는 일부러 원수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수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무슨 원수 맺은 일이 있어서 사자굴이나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엘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그를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다니엘에게서 어떠한 허물이나 흠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계략을 꾸며 원수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상대의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걸고 넘어짐으로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에 의를 이룬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원수 맺어진 상황에서 어려움을 대처하고 풀어 나가는 데는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만큼 악이 없었으나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이 악한 이들의 악을 담대하게 지적하고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요 결코 잘못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써 악한 사람들의 궤계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언행이 온전하시니 누구에게든지 흠 잡힐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되 주위의 모든 환경을 고요하게 평정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나 행동이 온전치 못한 분야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려지는 문제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진정한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상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않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무시당하는 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시하는 마음은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임금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신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러하지요. 그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삶의 여정들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대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하는 등 심히 패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함으로 강국이었던 바벨론과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하룻밤만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를 두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의롭고 자기 보기에 옳은 견해를 내세워 주장하며 억지로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상대편에서는 자기 의견이 묵살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 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지 못한 것이지요.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상적인 사람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하게 느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고 설령 현저히 무시당했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악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만큼 고통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약자 편에서는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먼저 된 사람이 그 사정을 헤아려 주고 더 신중히 행하여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 편보다 더 낫게 여기다 보면 가르치려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을 듣는 상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깨우침을 주고자 할 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려 주기 위하여 설명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음에서 온전히 빼내 버리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모든 언행을 온전케 하여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08
제14과이 세대의 비유
마 11:16-17
읽을말씀 : 마 11:16-17 | 외울말씀 : 마 11:17
교육목표 : 죄악이 관영한 이 세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을 버리고 좋은 일에 같이 피리 불며 춤출 줄 아는 선한 마음을 소유하게 한다.
오늘날은 예전과 달리 가족과 이웃간의 사랑이 식어져 더욱 자기의 유익을 취하며 서로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 등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악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1.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를 비유하여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면서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갑니다.
예전에는 누가 교회에 나와서 치료를 받았다거나 변화되었다거나 하는 소문을 들으면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함께 모여 은혜를 나누고자 하며 소문만 듣고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은혜로운 일을 듣고 보아도 그저 '그랬나 보다' 하고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여기서 이미 사람의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일수록 축하의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은혜를 받아 그 교회에 함께 가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 사람일수록, 또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도리어 멀리하는 사람일수록 악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이 땅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자신이 아벨처럼 바르게 제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을 발하며 시기 질투하다가 결국은 동생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요한복음 3:26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 하였을 때 세례 요한은 '나를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니 나는 비참하게 되었구나' 하며 탄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지요.
세례 요한의 부모들 역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41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나아옵니다. 이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동정녀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도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함께 피리를 불며 함께 춤을 출 줄 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한 마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악한 길로 빠져 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례 요한처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자기 생각에 맞추어 판단하며 싫어하는 사람들
오늘날은 좋은 일을 보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아니하면 오히려 미워하고 싫어하며 함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일수록 좋은 일을 보면 자기 생각에 맞느냐 안 맞느냐를 따지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 좋은 일이면 좋다 여기면서 부질없이 악을 쌓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일이거나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이해되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옳은 일을 싫어하고 멀리한다면 그만큼 악이 많은 것이지요.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서 판단 정죄하고 싫어한 예들은 성경상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예수님을 모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을 오히려 시기 질투하여서 귀신에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를 본 가룟 유다가 분을 내며 책망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사랑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 행함을 칭찬하시며 이 일을 널리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 6-9). 이것은 가룟 유다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고 이 후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칭찬받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칭찬받으면 싫어하는 것은 다 악인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유익에 상관없이 옳은 일에 옳다 하며 같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마음이지요. 이런 사람의 예로 교법사 가말리엘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도들에 의해 민간에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은 이를 시기하여 사도들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교법사 가말리엘이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5-39)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말리엘의 공의롭고 조리있는 말 앞에 아무리 노한 그들도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고 다만 사도들을 채찍질한 후에 놓아 주었지요.
성도 여러분, 좋은 일을 보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싫어하며 함께하지 않는 마음들이 남아 있는 이상은 전체가 하나로 화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마음을 변화시켜 진리와 사랑과 성령으로 하나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상대가 잘되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마음이요, 선의 마음이지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본받아 배우려 하고 붙좇으려 하며 듣고 알려고 하지요.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시기하여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훼방하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거나 일이 잘되어 이름이 드러나고 여러 가지 공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기도 그와 같이 이루기를 열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선한 사람이라면 배우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오히려 훼방하거나 말을 지어내어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담이 되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흩어져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알려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며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전하자 이들은 마음에 찔려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마음을 겸비케 하고 묻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악한 사람들은 이를 갈지만 선한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은 완전히 반대이므로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권면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좋은 일에 같이 피리 불며 춤출 줄 알고 같이 좋아하는 선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죄악이 관영한 이 세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을 버리고 좋은 일에 같이 피리 불며 춤출 줄 아는 선한 마음을 소유하게 한다.
오늘날은 예전과 달리 가족과 이웃간의 사랑이 식어져 더욱 자기의 유익을 취하며 서로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 등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악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1.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를 비유하여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면서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갑니다.
예전에는 누가 교회에 나와서 치료를 받았다거나 변화되었다거나 하는 소문을 들으면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함께 모여 은혜를 나누고자 하며 소문만 듣고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은혜로운 일을 듣고 보아도 그저 '그랬나 보다' 하고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여기서 이미 사람의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일수록 축하의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은혜를 받아 그 교회에 함께 가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 사람일수록, 또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도리어 멀리하는 사람일수록 악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이 땅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자신이 아벨처럼 바르게 제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을 발하며 시기 질투하다가 결국은 동생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요한복음 3:26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 하였을 때 세례 요한은 '나를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니 나는 비참하게 되었구나' 하며 탄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지요.
세례 요한의 부모들 역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41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나아옵니다. 이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동정녀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도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함께 피리를 불며 함께 춤을 출 줄 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한 마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악한 길로 빠져 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례 요한처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자기 생각에 맞추어 판단하며 싫어하는 사람들
오늘날은 좋은 일을 보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아니하면 오히려 미워하고 싫어하며 함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일수록 좋은 일을 보면 자기 생각에 맞느냐 안 맞느냐를 따지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 좋은 일이면 좋다 여기면서 부질없이 악을 쌓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일이거나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이해되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옳은 일을 싫어하고 멀리한다면 그만큼 악이 많은 것이지요.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서 판단 정죄하고 싫어한 예들은 성경상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예수님을 모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을 오히려 시기 질투하여서 귀신에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를 본 가룟 유다가 분을 내며 책망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사랑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 행함을 칭찬하시며 이 일을 널리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 6-9). 이것은 가룟 유다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고 이 후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칭찬받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칭찬받으면 싫어하는 것은 다 악인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유익에 상관없이 옳은 일에 옳다 하며 같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마음이지요. 이런 사람의 예로 교법사 가말리엘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도들에 의해 민간에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은 이를 시기하여 사도들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교법사 가말리엘이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5-39)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말리엘의 공의롭고 조리있는 말 앞에 아무리 노한 그들도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고 다만 사도들을 채찍질한 후에 놓아 주었지요.
성도 여러분, 좋은 일을 보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싫어하며 함께하지 않는 마음들이 남아 있는 이상은 전체가 하나로 화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마음을 변화시켜 진리와 사랑과 성령으로 하나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상대가 잘되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마음이요, 선의 마음이지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본받아 배우려 하고 붙좇으려 하며 듣고 알려고 하지요.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시기하여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훼방하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거나 일이 잘되어 이름이 드러나고 여러 가지 공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기도 그와 같이 이루기를 열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선한 사람이라면 배우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오히려 훼방하거나 말을 지어내어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담이 되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흩어져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알려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며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전하자 이들은 마음에 찔려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마음을 겸비케 하고 묻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악한 사람들은 이를 갈지만 선한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은 완전히 반대이므로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권면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좋은 일에 같이 피리 불며 춤출 줄 알고 같이 좋아하는 선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01
제13과부활의 소망과 확신
요 11:25-26, 고전 15:12-22
읽을말씀 : 요 11:25-26, 고전 15:12-22 | 외울말씀 : 고전 15:20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의미와 증거들을 알아봄으로 부활의 확신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1.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기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음을 보았고,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나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렸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불구의 몸을 가졌던 경우 또는 죽은 지 오래되어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라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부활체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일도 항상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부활의 증거
그러면 우리 주변에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주 만물과 자연에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만 보아도 부활이 참이요,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1:20). 예를 들어, 번데기가 변하여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꿈틀대던 굼벵이가 어느새 하늘을 나는 매미가 되고, 구더기가 변하여 파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는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초목의 생명으로 뒤덮이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곧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은 성경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할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을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또한 흰옷을 입고 해같이 빛나는 신령한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장차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증거일 뿐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었다가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여러 번 예언해 놓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체의 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심어 주신 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9-11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임하실 것입니다(마 24장, 살전 4장).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무덤에 장사된 육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그 후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수차례 친히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모두 도망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순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천국이 확실히 믿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결코 평안함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간구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지요(행 7:59-60).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확신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떠한 고통도 괘념하지 않고 평생을 즐거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0:24).
5.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확신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곧 혼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왜 혼을 깨뜨려야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의 머리에는 뇌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아 느낀 느낌들이 이 기억장치에 입력되는 것입니다.
즉 뇌세포를 하나의 그릇이라 한다면 이 그릇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력되어 기억되는 내용물은 곧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이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며, 입력되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식과 생각과 지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 속에 담긴 내용물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이나 이러한 지식을 사용하는 생각, 지혜, 이론 등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으로 믿으려면 바로 혼을 깨뜨리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혼을 깨뜨리면 그만큼 마음이 무한대로 커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신뢰, 즉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바탕 위에 반드시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2:21-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 보임으로 행함을 통해 확신이 와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뢰를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통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롬 10:9-10). 먼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의의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고백이 곧 믿음의 행함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온전히 믿어드릴 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구원받아 천국에도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뜨거워지며 치료와 응답의 역사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하여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25
제12과네가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눅 22:39-44
읽을말씀 : 눅 22:39-44 | 외울말씀 : 눅 22:42
교육목표 :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께서 마신 고난의 잔이 어떠한 것이며 그 잔을 마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깨달아 감사함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제자들에게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순종하여 이루어 가셨습니다. 때가 되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알려 주셨지요. 마태복음 20:18-19을 보면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많은 고뇌가 담긴 말씀이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거나 깨우치지를 못하고 다가올 주의 나라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쏟고 있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철없는 제자들을 향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시며 천국에서 영화로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질문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이었기에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노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대로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여덟 명의 제자들도 과연 주님의 잔을 함께 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주의 부활을 목도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며 주의 고난의 잔을 함께 마셨던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의 질병과 연약함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놀라운 권능을 베푸시며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지요.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감람산에 오르셔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의 핏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받게 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참혹한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시고자 능력을 구하시는 기도였지요.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유대인들에게 잡히셨고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밤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에 피가 낭자하였습니다.
잔인한 고문을 당하심으로 머리와 얼굴을 비롯하여 온몸이 피로 물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육중한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지요. 잡수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많은 피를 흘리시고 또다시 채찍질 당하며 가시는 예수님의 지친 몸에 그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쓰러졌다 일어서고 다시 쓰러졌다 일어나서 힘겨운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곁에는 부축해 줄 제자들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요.
마침내 로마 군병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못박기 시작합니다. 백부장의 신호에 따라 군병이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연약한 살 속으로 못이 박히면서 피를 흘리지만 급소를 피해서 박기 때문에 고통만 극심하게 받을 뿐 금방 죽지는 않습니다. 못을 박은 후 십자가를 세우자 못박힌 손과 발에 몸 전체의 무게가 실리면서 찢겨지는 고통은 가중되었지요.
이렇게 못박힌 채로 예수님께서는 여섯 시간 동안을 한낮 사막의 강렬한 햇볕 아래 매달려 계셨습니다. 죽기까지 계속해서 피를 쏟아야 하니 타는 목마름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사막지대의 독한 벌레들이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도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벌거벗은 몸으로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군중들은 저주하며 희롱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라야 온 인류를 구원하실 줄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에 결코 내려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죽기까지 사랑의 간구만을 올리셨지요. 이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시니 마침내 영혼이 떠나고 십자가의 고난을 마치셨습니다.
3.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의 예수님의 마음
채찍에 맞으실 때, 피가 낭자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실 때, 또한 저주의 십자가에 손발이 못박히실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탄식이나 원망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실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태초에 주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셨고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서로 나누셨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도 주 예수님께서는 장차 친히 어떤 일을 겪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곧 때가 되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는 군중들과 채찍으로 때리고 손발에 못을 박는 군병들을 보실 때도 그 마음에는 오직 사랑과 긍휼만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창조한 영혼들이며 아버지의 생기를 받은 영혼들이라 이들이 알지 못함으로 악을 행하나 장차 나를 믿고 구원받게 하리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까지도 긍휼과 자비의 기도를 올리셨지요.
이렇게 사랑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또 십자가에 높이 달려 군중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처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이후로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천국에서 지내셨던 때, 한없는 사랑과 기쁨을 서로 나누며 또 앞으로 참된 자녀들을 얻을 계획 속에 즐거워하셨던 일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 나누었던 사랑의 말씀들이 기억나시며 고난받는 내 모습을 보심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프실까 생각하심으로 슬프고 민망한 마음도 드셨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자라셨던 기억과 마지막 3년 동안 사랑을 나누셨던 제자들, 그리고 주님을 섬겼던 선한 여인들을 떠올리시지요.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도 이들은 땅에 남아 고난받을 것을 생각하면 심히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기시다가도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실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마음에 위로가 되십니다.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여 천국에 올 것을 생각함으로 위로를 받으시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들을 통해 무수한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고 그중에서도 많은 영혼들이 성결되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올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4. 오늘도 동일하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과 권능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인성도 가지심으로 사람으로서 피곤하고 배고픈 것도 느끼며 슬픈 것, 아픈 것도 다 느끼셨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좇아 배신하여 떠날 때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도 슬프고 상하셨으며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실 때도 예수님이라고 해서 덜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감당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으신지요?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누가 크냐 다투었던 철없는 모습이었지만 성령받고 변화된 후에는 능히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8:17-18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대로 큰 소망 가운데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거나 톱으로 켜고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 던지울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이 멸시받을지라도, 관제와 같이 형체도 없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가? 부귀 영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 행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이라도 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주여, 내가 그러합니다." 하고 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어 마음의 소원마다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여러분의 삶에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도 오직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항상 기억하며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함으로 주님의 잔을 마시며 십자가를 함께 지심으로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께서 마신 고난의 잔이 어떠한 것이며 그 잔을 마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깨달아 감사함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제자들에게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순종하여 이루어 가셨습니다. 때가 되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알려 주셨지요. 마태복음 20:18-19을 보면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많은 고뇌가 담긴 말씀이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거나 깨우치지를 못하고 다가올 주의 나라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쏟고 있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철없는 제자들을 향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시며 천국에서 영화로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질문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이었기에 주의 잔을 마실 수 있노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대로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여덟 명의 제자들도 과연 주님의 잔을 함께 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주의 부활을 목도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며 주의 고난의 잔을 함께 마셨던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의 질병과 연약함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놀라운 권능을 베푸시며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지요.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감람산에 오르셔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의 핏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받게 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참혹한 고난을 온전히 감당하시고자 능력을 구하시는 기도였지요.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유대인들에게 잡히셨고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밤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에 피가 낭자하였습니다.
잔인한 고문을 당하심으로 머리와 얼굴을 비롯하여 온몸이 피로 물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육중한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지요. 잡수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많은 피를 흘리시고 또다시 채찍질 당하며 가시는 예수님의 지친 몸에 그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쓰러졌다 일어서고 다시 쓰러졌다 일어나서 힘겨운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곁에는 부축해 줄 제자들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요.
마침내 로마 군병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못박기 시작합니다. 백부장의 신호에 따라 군병이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연약한 살 속으로 못이 박히면서 피를 흘리지만 급소를 피해서 박기 때문에 고통만 극심하게 받을 뿐 금방 죽지는 않습니다. 못을 박은 후 십자가를 세우자 못박힌 손과 발에 몸 전체의 무게가 실리면서 찢겨지는 고통은 가중되었지요.
이렇게 못박힌 채로 예수님께서는 여섯 시간 동안을 한낮 사막의 강렬한 햇볕 아래 매달려 계셨습니다. 죽기까지 계속해서 피를 쏟아야 하니 타는 목마름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사막지대의 독한 벌레들이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도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벌거벗은 몸으로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군중들은 저주하며 희롱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라야 온 인류를 구원하실 줄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에 결코 내려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죽기까지 사랑의 간구만을 올리셨지요. 이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시니 마침내 영혼이 떠나고 십자가의 고난을 마치셨습니다.
3.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의 예수님의 마음
채찍에 맞으실 때, 피가 낭자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실 때, 또한 저주의 십자가에 손발이 못박히실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탄식이나 원망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실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태초에 주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셨고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서로 나누셨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도 주 예수님께서는 장차 친히 어떤 일을 겪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곧 때가 되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는 군중들과 채찍으로 때리고 손발에 못을 박는 군병들을 보실 때도 그 마음에는 오직 사랑과 긍휼만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창조한 영혼들이며 아버지의 생기를 받은 영혼들이라 이들이 알지 못함으로 악을 행하나 장차 나를 믿고 구원받게 하리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까지도 긍휼과 자비의 기도를 올리셨지요.
이렇게 사랑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또 십자가에 높이 달려 군중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처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이후로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천국에서 지내셨던 때, 한없는 사랑과 기쁨을 서로 나누며 또 앞으로 참된 자녀들을 얻을 계획 속에 즐거워하셨던 일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 나누었던 사랑의 말씀들이 기억나시며 고난받는 내 모습을 보심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프실까 생각하심으로 슬프고 민망한 마음도 드셨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자라셨던 기억과 마지막 3년 동안 사랑을 나누셨던 제자들, 그리고 주님을 섬겼던 선한 여인들을 떠올리시지요.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도 이들은 땅에 남아 고난받을 것을 생각하면 심히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기시다가도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실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마음에 위로가 되십니다.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여 천국에 올 것을 생각함으로 위로를 받으시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들을 통해 무수한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고 그중에서도 많은 영혼들이 성결되어 하나님의 참자녀로 나올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4. 오늘도 동일하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과 권능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인성도 가지심으로 사람으로서 피곤하고 배고픈 것도 느끼며 슬픈 것, 아픈 것도 다 느끼셨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좇아 배신하여 떠날 때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도 슬프고 상하셨으며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실 때도 예수님이라고 해서 덜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감당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으신지요?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누가 크냐 다투었던 철없는 모습이었지만 성령받고 변화된 후에는 능히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8:17-18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대로 큰 소망 가운데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거나 톱으로 켜고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 던지울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이 멸시받을지라도, 관제와 같이 형체도 없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가? 부귀 영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 행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이라도 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주여, 내가 그러합니다." 하고 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어 마음의 소원마다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여러분의 삶에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도 오직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항상 기억하며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함으로 주님의 잔을 마시며 십자가를 함께 지심으로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18
제11과하나님의 뜻대로
롬 8:27-28
읽을말씀 : 롬 8:27-28 | 외울말씀 : 롬 8:2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쁘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을 두루 찾으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한 나라의 임금에게 충성스런 신하는 몸에 좋은 양약과도 같고 추수하는 타작 마당의 시원한 얼음 냉수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입니다(잠 13:17, 25:13). 예를 들면, 다윗 왕에게 있어서 나단 선지자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왕을 위해 직언하여 바르고 유익한 길로 이끌어주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역시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줌으로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인물이었지요.
가정이나 회사, 국가 등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의 가장이 바로 서 있으면 가정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며 나라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바로 서 있으면 정치 기강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조직이든 지도층이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27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와 주관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가 열납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자기의 할 일 이상으로 월권하여 무리하게 일하는 경우, 사람들 간에 갈등과 문제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어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분야에 뛰어난 전문가라 할지라도 막상 현실의 다양한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아는 것을 나누고 배우며 부족한 분야를 상호 보완하면서 완벽을 기해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시야를 넓혀 다른 분야도 배우며 지적을 받고 권면을 들을 줄도 알아야 자기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권면을 들었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로 분별하여 자신을 더 온전히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반면에 지적이나 권면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견을 내고 일을 추진할 때는 대부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달리 말하고 권면할 때는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마음에 새겨서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도 모르는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상대가 잘못 봤으면 그냥 잊어버리면 되고 반대로 깨달음이 되었으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요직에 있거나 일꾼된 사람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머리된 사람일수록 파급되는 영향력이 커서 작은 실수로도 전체가 큰 손실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머리된 사람에 대한 신임이 두터울수록 많은 것을 의뢰하고 맡기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셨으니 항상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겸손히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각각 그 목적된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맡겨졌을 때 혼자 다 하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원하시므로 본인이 다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더 나은 사람에게 맡겨 온전하게 이룰 것인가'를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바로 선한 양심과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보다 전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목적 자체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칭찬을 듣기 위해서 직접 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바라보고 펼쳐 나간다면 더 유능한 사람을 통하여 더 아름답고 크게 이룰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각각 그 목적된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업적과 교회의 유익이 상반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럴 때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보다 교회와 목자에게 보탬이 되고 힘이 되어 주는 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들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 집착하여 계산하지 않으며 결코 성급하게 생각을 동원하지 않는 사람이 큰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도 저것도 다 감당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의를 생각하는 마음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좋고 유익한 것이라면 가르쳐 주고 도와주며 서로 유익함을 함께 나눈다면 더욱 가치 있는 일이지요.
잠언 12:5을 보면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생각이 공직하다는 것은 의인은 생각을 바르게 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직하다고 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냐, 가정의 일이냐, 하나님의 일이냐, 세상의 일이냐를 분명하게 나누어 바르게 정하며 일의 구분점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의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 구분하여 바르게 처신하며 결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어떤 일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가 무너졌을 때 바로 행하지 못하고 치우쳐 편벽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지요.
이와 같이 모든 일에 공직해야만 비로소 현명한 판단이 내려져 목적된 일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나서야 할 것과 나서지 말아야 할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규율과 질서 등 모든 것들을 명백하게 구분하되 진리 안에서 잘 분별해야 합니다.
3) 좋은 사람을 추천하고 밀어 줄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크게 이룰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나서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관중과 포숙아는 우정이 매우 두터운 사이로 모두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관중은 공자 규를 섬겼고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자'라는 말은 지체 높은 집안의 젊은 자제를 뜻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반란이 일어나 소백과 규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자 규는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맞았고 그를 섬겼던 관중은 소백의 포로가 되었지요.
여기서 특이할 만한 일은 새로 임금이 된 소백에게 포숙아가 관중을 신하로 추천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관중의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포숙아는 비록 자신이 일등 공신이었지만 나라와 임금이 잘되기 위한 목적된 일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관중의 지혜와 능력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백이 자신의 적이었던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만약 주공께서 지금의 왕으로 만족하신다면 저만 있어도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제패하기 원하신다면 관중 같은 인물이 아니고서는 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우실 줄로 압니다." 권면했습니다. 결국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맡게 되었고 지혜로운 그의 지모(智謀) 덕분에 소백은 여러 제후를 모아 천하를 크게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대가 자기보다 지혜와 능력이 더 낫다면 대의를 위해 자신의 유익은 조금도 구하지 않고 그를 높여 주고 밀어 주며 자신은 그 밑에서 섬기려 하는 마음이 바로 영의 마음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느 방면에 아주 능통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경우도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과 화합하여 공로를 나누고 발전시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혼자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자신의 업적으로만 마감해 버리고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후자처럼 되지말고 좁은 소견으로 행하는 자세를 개선해야 전체가 발전할 수 있고 크게 유업을 이룰 수 있으므로 넓게 생각하며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합당한 사람을 추천해 주고 밀어 줌으로 하나님 앞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유익은 뒤로 하고 상대를 힘껏 밀어줄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다른 사람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이루며 유능한 인재를 밀어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소유함으로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쁘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을 두루 찾으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한 나라의 임금에게 충성스런 신하는 몸에 좋은 양약과도 같고 추수하는 타작 마당의 시원한 얼음 냉수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입니다(잠 13:17, 25:13). 예를 들면, 다윗 왕에게 있어서 나단 선지자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왕을 위해 직언하여 바르고 유익한 길로 이끌어주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역시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줌으로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인물이었지요.
가정이나 회사, 국가 등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의 가장이 바로 서 있으면 가정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며 나라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바로 서 있으면 정치 기강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조직이든 지도층이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27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와 주관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가 열납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자기의 할 일 이상으로 월권하여 무리하게 일하는 경우, 사람들 간에 갈등과 문제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어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분야에 뛰어난 전문가라 할지라도 막상 현실의 다양한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아는 것을 나누고 배우며 부족한 분야를 상호 보완하면서 완벽을 기해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시야를 넓혀 다른 분야도 배우며 지적을 받고 권면을 들을 줄도 알아야 자기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권면을 들었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로 분별하여 자신을 더 온전히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반면에 지적이나 권면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견을 내고 일을 추진할 때는 대부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달리 말하고 권면할 때는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마음에 새겨서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도 모르는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상대가 잘못 봤으면 그냥 잊어버리면 되고 반대로 깨달음이 되었으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요직에 있거나 일꾼된 사람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머리된 사람일수록 파급되는 영향력이 커서 작은 실수로도 전체가 큰 손실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머리된 사람에 대한 신임이 두터울수록 많은 것을 의뢰하고 맡기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셨으니 항상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겸손히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각각 그 목적된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맡겨졌을 때 혼자 다 하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원하시므로 본인이 다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더 나은 사람에게 맡겨 온전하게 이룰 것인가'를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바로 선한 양심과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보다 전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목적 자체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칭찬을 듣기 위해서 직접 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바라보고 펼쳐 나간다면 더 유능한 사람을 통하여 더 아름답고 크게 이룰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각각 그 목적된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업적과 교회의 유익이 상반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럴 때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보다 교회와 목자에게 보탬이 되고 힘이 되어 주는 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들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 집착하여 계산하지 않으며 결코 성급하게 생각을 동원하지 않는 사람이 큰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도 저것도 다 감당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의를 생각하는 마음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좋고 유익한 것이라면 가르쳐 주고 도와주며 서로 유익함을 함께 나눈다면 더욱 가치 있는 일이지요.
잠언 12:5을 보면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생각이 공직하다는 것은 의인은 생각을 바르게 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직하다고 하는 것은 나라의 일이냐, 가정의 일이냐, 하나님의 일이냐, 세상의 일이냐를 분명하게 나누어 바르게 정하며 일의 구분점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의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 구분하여 바르게 처신하며 결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어떤 일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가 무너졌을 때 바로 행하지 못하고 치우쳐 편벽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지요.
이와 같이 모든 일에 공직해야만 비로소 현명한 판단이 내려져 목적된 일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나서야 할 것과 나서지 말아야 할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규율과 질서 등 모든 것들을 명백하게 구분하되 진리 안에서 잘 분별해야 합니다.
3) 좋은 사람을 추천하고 밀어 줄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크게 이룰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나서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관중과 포숙아는 우정이 매우 두터운 사이로 모두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관중은 공자 규를 섬겼고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자'라는 말은 지체 높은 집안의 젊은 자제를 뜻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반란이 일어나 소백과 규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자 규는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맞았고 그를 섬겼던 관중은 소백의 포로가 되었지요.
여기서 특이할 만한 일은 새로 임금이 된 소백에게 포숙아가 관중을 신하로 추천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관중의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포숙아는 비록 자신이 일등 공신이었지만 나라와 임금이 잘되기 위한 목적된 일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관중의 지혜와 능력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백이 자신의 적이었던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만약 주공께서 지금의 왕으로 만족하신다면 저만 있어도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제패하기 원하신다면 관중 같은 인물이 아니고서는 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우실 줄로 압니다." 권면했습니다. 결국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맡게 되었고 지혜로운 그의 지모(智謀) 덕분에 소백은 여러 제후를 모아 천하를 크게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대가 자기보다 지혜와 능력이 더 낫다면 대의를 위해 자신의 유익은 조금도 구하지 않고 그를 높여 주고 밀어 주며 자신은 그 밑에서 섬기려 하는 마음이 바로 영의 마음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느 방면에 아주 능통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경우도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과 화합하여 공로를 나누고 발전시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혼자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자신의 업적으로만 마감해 버리고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후자처럼 되지말고 좁은 소견으로 행하는 자세를 개선해야 전체가 발전할 수 있고 크게 유업을 이룰 수 있으므로 넓게 생각하며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합당한 사람을 추천해 주고 밀어 줌으로 하나님 앞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유익은 뒤로 하고 상대를 힘껏 밀어줄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다른 사람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이루며 유능한 인재를 밀어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소유함으로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11
제10과천하에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나니
전 3:1-8
읽을말씀 : 전 3:1-8 | 외울말씀 : 전 3:1
교육목표 :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와 절제함 가운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범사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1. 절제의 열매의 필요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시지요.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고 언행이 거룩해지며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속히 이루어야 할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충성을 연관지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충성의 열매란 맡겨진 직무와 주어진 대가 이상을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일한다거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처럼 힘을 다하여 드리기를 기뻐하는 행함을 충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늘 쉴 새 없이 충성한다면 결국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므로 충성이라는 것도 쉼이 있는 충성이 되어야 하지요. 중간 중간에 쉼을 가짐으로 활력을 되찾아야 지치지 않고 계속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이며 절제가 있음으로 변함없이 아름답게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말씀하신 것도 절제의 열매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한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때를 말하는데 땅에 뿌린 씨가 싹이 나기까지 일정한 기한이 있는 것이고 또한 열매를 얻고자 목적한 바가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왜 이렇게 싹이 나지 않나?' 하고 파헤치다 보면 오히려 씨를 버리는 결과가 되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모든 것이 기한이 있고 목적한 바가 있으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지만, 정작 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100세 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2. 범사에 풍성하고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면
1) 기한과 목적,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기한과 목적, 때를 이룸에 있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기도가 좋아서 주 안에서 모이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하지 않고 늘상 교회에서 산다거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간증을 끊임없이 들려 줍니다.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범사에 가장 합당한 때를 분별하여 행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지혜롭게 주어진 목적이 달성되도록 해야 하고 더 나아가 때를 맞추어 잘 이루어야 합니다.
곧 기도회라든가, 교회 모임이라든가, 대화하고 전달하는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성령의 주관 속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알맞은 때에 행해져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일 범사에 목적과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만 가지고 무분별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매우 약한 것 같지만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제하거나 조심하다가 도무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주관을 받으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이렇게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가 필요합니다
국가적인 일이든, 사업터나 일터, 가정의 일이든 어떠한 일을 계획할 때에 좋은 방안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고의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계사, 또는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한에 맞게 어떤 목적한 바를 가지고 나갔다 할지라도 자칫 무리를 하다보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중종 임금 때에 조광조의 개혁이 그러했고, 중국 역사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통한 개혁이 그러했습니다. 옳고 좋은 일이라 해서 너무 급진적으로 밀고나갔다가 오히려 위협을 느낀 반대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아무 때든지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믿음을 심어 주시고 제자들을 기르시는 등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때가 이르러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없이 나타났고, 오히려 더 크게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있는 주의 종에게 기도받으면 무조건 응답받는 줄로 여기지만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정성을 내보이는 등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도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통해 죄를 벗어내야 하며 불같은 기도와 믿음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 생명으로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은혜를 입고 충만하다고 해서 무조건 마음에 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충만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절제하며 두루두루 모든 분야를 잘 이끌어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신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교회나 선교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성급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나 일꾼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연결시켜 주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쳐야 합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후계자로 삼고자 할 때 단번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겪으며 기초를 다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충만하고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범사에 기한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인내 속에서 두루두루 살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마음에 맞추어 선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고 성령이 충만하여 감동을 입게 되면 다 주고 싶고 좋은 일, 선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든지 다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되어 주기 원하지요. 이렇게 행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만함 가운데 무조건 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분별하게 돕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구약 성경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풍랑이 일어나고 급기야 뱃사람들이 배에 있는 물품들을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대풍이 왔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돕지 아니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며 구제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 병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잘 분별해서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교회를 세운다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를 못 맞추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면 복을 받을 수 없지요. 혹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복이 임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이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에 범사가 기한과 목적과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일에 항상 기한과 목적과 때를 맞추어 지혜롭게 행하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하고 절제함으로 아름답고 온전하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와 절제함 가운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범사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1. 절제의 열매의 필요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시지요.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고 언행이 거룩해지며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속히 이루어야 할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충성을 연관지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충성의 열매란 맡겨진 직무와 주어진 대가 이상을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일한다거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처럼 힘을 다하여 드리기를 기뻐하는 행함을 충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늘 쉴 새 없이 충성한다면 결국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므로 충성이라는 것도 쉼이 있는 충성이 되어야 하지요. 중간 중간에 쉼을 가짐으로 활력을 되찾아야 지치지 않고 계속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이며 절제가 있음으로 변함없이 아름답게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말씀하신 것도 절제의 열매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한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때를 말하는데 땅에 뿌린 씨가 싹이 나기까지 일정한 기한이 있는 것이고 또한 열매를 얻고자 목적한 바가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왜 이렇게 싹이 나지 않나?' 하고 파헤치다 보면 오히려 씨를 버리는 결과가 되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모든 것이 기한이 있고 목적한 바가 있으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지만, 정작 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100세 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2. 범사에 풍성하고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면
1) 기한과 목적,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기한과 목적, 때를 이룸에 있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기도가 좋아서 주 안에서 모이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하지 않고 늘상 교회에서 산다거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간증을 끊임없이 들려 줍니다.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범사에 가장 합당한 때를 분별하여 행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지혜롭게 주어진 목적이 달성되도록 해야 하고 더 나아가 때를 맞추어 잘 이루어야 합니다.
곧 기도회라든가, 교회 모임이라든가, 대화하고 전달하는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성령의 주관 속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알맞은 때에 행해져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일 범사에 목적과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만 가지고 무분별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매우 약한 것 같지만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제하거나 조심하다가 도무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주관을 받으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이렇게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가 필요합니다
국가적인 일이든, 사업터나 일터, 가정의 일이든 어떠한 일을 계획할 때에 좋은 방안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고의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계사, 또는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한에 맞게 어떤 목적한 바를 가지고 나갔다 할지라도 자칫 무리를 하다보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중종 임금 때에 조광조의 개혁이 그러했고, 중국 역사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통한 개혁이 그러했습니다. 옳고 좋은 일이라 해서 너무 급진적으로 밀고나갔다가 오히려 위협을 느낀 반대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아무 때든지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믿음을 심어 주시고 제자들을 기르시는 등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때가 이르러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없이 나타났고, 오히려 더 크게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있는 주의 종에게 기도받으면 무조건 응답받는 줄로 여기지만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정성을 내보이는 등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도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통해 죄를 벗어내야 하며 불같은 기도와 믿음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 생명으로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은혜를 입고 충만하다고 해서 무조건 마음에 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충만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절제하며 두루두루 모든 분야를 잘 이끌어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신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교회나 선교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성급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나 일꾼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연결시켜 주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쳐야 합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후계자로 삼고자 할 때 단번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겪으며 기초를 다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충만하고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범사에 기한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인내 속에서 두루두루 살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마음에 맞추어 선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고 성령이 충만하여 감동을 입게 되면 다 주고 싶고 좋은 일, 선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든지 다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되어 주기 원하지요. 이렇게 행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만함 가운데 무조건 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분별하게 돕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구약 성경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풍랑이 일어나고 급기야 뱃사람들이 배에 있는 물품들을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대풍이 왔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돕지 아니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며 구제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 병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잘 분별해서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교회를 세운다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를 못 맞추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면 복을 받을 수 없지요. 혹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복이 임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이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에 범사가 기한과 목적과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일에 항상 기한과 목적과 때를 맞추어 지혜롭게 행하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하고 절제함으로 아름답고 온전하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04
제9과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고후 10:18
읽을말씀 : 고후 10:18 | 외울말씀 : 고후 10: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주께 칭찬을 받으며 범사에 형통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체가 이웃에게 뭔가 귀감이 되거나 덕이 되며 은혜를 끼칠 만한 것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덕을 세우고 이웃에게 기림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성경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이 드러나고 알려지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민망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나오는 바르실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왕궁을 떠나 쫓기고 있던 때에 다윗 왕과 그의 군대에게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반란이 진정된 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던 다윗 왕은 그에게 동행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는데, 이때 바르실래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고 좋은 말로 정중히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선한 마음이니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왕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참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평소 행하지 않던 선한 일을 어쩌다가 한 번 행하기라도 하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사람 앞에 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행한 선행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고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인지, 아니면 외식인지를 깨달아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벗어 버려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려면
1) 상대가 지키지 못한다 해서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나갈 때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의 티가 보이니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상대편에서 물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사명이나 의무가 있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설명해 줌으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할 따름이지 나무라거나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중심에서 지적 받기를 사모하며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부득불 지적할 수 있지요.
만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머리되고 일꾼된 분일수록, 그리고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보 단계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삼가 주의해야 하지요.
우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약 4:11) 언행 가운데 지적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의 티를 잡고 싶은 마음까지라도 철저히 버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의와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남을 지적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티가 보이겠습니까? 설령 보인다 해도 보이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며, 더구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티를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시하는 일이지요. 마음에 온전한 섬김이 있다면 그저 상대의 좋은 점만 보려 하고 좋은 점만 말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거나 들레지 않으니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마 12:19-20).
따라서 자신이 지킨다고 해서 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아니하며 피차에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노하고 감정 표현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늘 부담스럽고 긴장을 하게 되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은 자신의 일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윗사람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아랫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성격이 모나고 혹 부족하여 내 생각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질서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서로가 합력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윗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본적인 틀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18).
아랫사람이 아무리 부림을 당한다 해도 마음이 선하면 고통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선하다 하여 윗사람이 무례히 행하거나 지적하고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피차간에 무엇을 말할 때나 권면할 때, 또 무엇을 전할 때에도 가르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섬기는 마음으로, 다만 아는 것을 말하려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간에 섬김의 마음이 없으면 상대로 인해 불편해지고 때로 분을 내거나 악한 말을 하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아픔을 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1:19-20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고 눌러 참았다가 나중에 성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보기에는 성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성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이러한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빼낼 때, 크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쁜 일을 만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그릇이요, 작은 마음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칭찬을 듣거나 지적을 받을 때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소인은 열 가지 칭찬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자체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기뻐하지만, 대인은 열 가지 칭찬을 다 참조는 하되 그중에서 자신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칭찬받을 일로 칭찬을 받았다면 그것은 묻어 두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개선할 점을 발견하여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일이라면 중심에서 사양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소인은 열 가지 지적을 받으면 열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힘을 잃고 주저앉지만 대인은 지적해 준 자체는 감사하니 참조는 하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좇아 더 발전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개선해 나가게 되지요.
성경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지칭하신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좇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고넬료, 보아스 같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나 쌓은 지식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덕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과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는다 해도 의기소침해하거나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돌아보아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버릴 것은 버려 나가야 합니다.
4) 마음에 서운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애매히 고통을 주는 말,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서운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계속하여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에 신복들은 당장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노라고 격분했지만 다윗 왕은 내버려 두라고 만류하지요(삼하 16장).
만일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을 소유했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초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사무엘하 16:12을 보면 다윗 왕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지요. 상대가 나를 저주하는데 그에 맞서 앙갚음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나를 저주했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선으로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큰 사람은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며 범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대인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며 좋은 행함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함으로 주께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주께 칭찬을 받으며 범사에 형통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체가 이웃에게 뭔가 귀감이 되거나 덕이 되며 은혜를 끼칠 만한 것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덕을 세우고 이웃에게 기림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성경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이 드러나고 알려지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민망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나오는 바르실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왕궁을 떠나 쫓기고 있던 때에 다윗 왕과 그의 군대에게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반란이 진정된 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던 다윗 왕은 그에게 동행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는데, 이때 바르실래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고 좋은 말로 정중히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선한 마음이니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왕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참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평소 행하지 않던 선한 일을 어쩌다가 한 번 행하기라도 하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사람 앞에 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행한 선행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고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인지, 아니면 외식인지를 깨달아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벗어 버려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려면
1) 상대가 지키지 못한다 해서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나갈 때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의 티가 보이니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상대편에서 물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사명이나 의무가 있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설명해 줌으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할 따름이지 나무라거나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중심에서 지적 받기를 사모하며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부득불 지적할 수 있지요.
만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머리되고 일꾼된 분일수록, 그리고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보 단계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삼가 주의해야 하지요.
우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약 4:11) 언행 가운데 지적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의 티를 잡고 싶은 마음까지라도 철저히 버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의와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남을 지적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티가 보이겠습니까? 설령 보인다 해도 보이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며, 더구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티를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시하는 일이지요. 마음에 온전한 섬김이 있다면 그저 상대의 좋은 점만 보려 하고 좋은 점만 말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거나 들레지 않으니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마 12:19-20).
따라서 자신이 지킨다고 해서 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아니하며 피차에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노하고 감정 표현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늘 부담스럽고 긴장을 하게 되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은 자신의 일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윗사람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아랫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성격이 모나고 혹 부족하여 내 생각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질서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서로가 합력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윗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본적인 틀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18).
아랫사람이 아무리 부림을 당한다 해도 마음이 선하면 고통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선하다 하여 윗사람이 무례히 행하거나 지적하고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피차간에 무엇을 말할 때나 권면할 때, 또 무엇을 전할 때에도 가르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섬기는 마음으로, 다만 아는 것을 말하려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간에 섬김의 마음이 없으면 상대로 인해 불편해지고 때로 분을 내거나 악한 말을 하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아픔을 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1:19-20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고 눌러 참았다가 나중에 성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보기에는 성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성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이러한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빼낼 때, 크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쁜 일을 만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그릇이요, 작은 마음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칭찬을 듣거나 지적을 받을 때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소인은 열 가지 칭찬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자체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기뻐하지만, 대인은 열 가지 칭찬을 다 참조는 하되 그중에서 자신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칭찬받을 일로 칭찬을 받았다면 그것은 묻어 두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개선할 점을 발견하여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일이라면 중심에서 사양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소인은 열 가지 지적을 받으면 열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힘을 잃고 주저앉지만 대인은 지적해 준 자체는 감사하니 참조는 하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좇아 더 발전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개선해 나가게 되지요.
성경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지칭하신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좇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고넬료, 보아스 같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나 쌓은 지식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덕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과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는다 해도 의기소침해하거나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돌아보아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버릴 것은 버려 나가야 합니다.
4) 마음에 서운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애매히 고통을 주는 말,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서운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계속하여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에 신복들은 당장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노라고 격분했지만 다윗 왕은 내버려 두라고 만류하지요(삼하 16장).
만일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을 소유했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초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사무엘하 16:12을 보면 다윗 왕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지요. 상대가 나를 저주하는데 그에 맞서 앙갚음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나를 저주했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선으로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큰 사람은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며 범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대인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며 좋은 행함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함으로 주께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25
제8과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고전 2:13-16
읽을말씀 : 고전 2:13-16 | 외울말씀 : 고전 2:13
교육목표 : 육과 영의 차원을 비교하면서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4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사람의 영과 4차원 세계의 영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게 된 인류는 영원히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영이란 '죄성이 없는 깨끗한 상태의 마음'으로, 영이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 영이 가리워져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죽었던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으로 영을 낳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영의 사람이 되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세계인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영안(靈眼)을 열어 주시면 4차원의 세계도 볼 수 있게 되지요(행 7:56).
그런데 4차원인 영의 세계는 지식이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선지자나 주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무(無)로 돌리고 영에 속한 지식들로만 채워 나갔던 것입니다(빌 3:8). 또한 영으로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의 차이점
1) 육의 차원이 진화라면 영의 차원은 창조입니다
육의 세계는 썩고 변질되고 사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육의 차원에 익숙해진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모든 생물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저절로 진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생물이 진화로 말미암았고, 모든 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라면 어떻게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될 수 있겠고, 사시사철의 변화 등이 일정한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잘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주만물에 질서와 조화가 있고 완벽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을 볼 때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육으로 추측하여 진화를 주장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의 세계의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창조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육의 차원은 죽는 것이지만 영의 차원은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 되살아나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의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삼고 지켜 행해야 영이 살아갈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의 세계에서 썩어질 육의 양식을 먹고 살면 결국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영의 양식인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6:27).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육의 차원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악의 차원이니 결국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지만, 영의 차원은 선과 사랑의 차원이요, 희생의 차원이요, 영생으로 가는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이것을 신령한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육의 차원은 무(無)의 차원이고 영의 차원은 유(有)의 차원입니다
육의 차원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것뿐이기에 무(無)의 차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없는 것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유(有)의 차원입니다. 히브리서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도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영의 차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의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방법과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정확하게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에 들어와 영의 방법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든지 복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했을 때 중심에서 믿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니 결국 백 세에 독자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지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즉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곧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이처럼 육은 우리 눈에 보여야만 믿는 것이지만 영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는 것이기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육에 거함으로 영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의 사람을 오해하고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힘이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의 문제입니다. 즉 육의 사람은 육의 지식에서 비롯된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또한 마음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마음은 크고 아름다운 것이며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지만, 육의 마음은 자기 것만 알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죽어지고 낮아지며 섬기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욕심을 좇아 높아지려 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도무지 영의 사람들과 맞지 않으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육에 거하는 사람 편에서 마음이 악하므로 빛 앞에 자신의 악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악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찔림이 되니 큰 소리가 나고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에 속한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능히 마음으로 분별하고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령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4차원의 축복
육을 버리고 상대를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의 단계에 들어오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가 이해되고 4차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곧 진화가 아닌 창조의 역사를 믿을 수 있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게 되며, 무의 차원이 아니라 유의 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신 대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있는 사람이 영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처음에는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지나서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만 하면 범사에 형통하게 되니 영의 행복이 얼마나 온전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영에 거하는 사람은 능히 죽음도 이길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그만큼 권세가 주어지고, 구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찾으며, 두드리는 대로 열리니 부족할 것이 없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니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지고 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약속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을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육에 속해 있기 때문이요, 여전히 비진리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고집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신령한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믿음과 신앙의 성장 속도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이 오직 영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환경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결코 신령한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목표를 정했으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도전하되 변함없이 달려가야 하며 결코 늦추거나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가 깊은 수렁 가운데 빠진 듯한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비진리의 생각과 지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하시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육을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와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육과 영의 차원을 비교하면서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4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사람의 영과 4차원 세계의 영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게 된 인류는 영원히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영이란 '죄성이 없는 깨끗한 상태의 마음'으로, 영이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 영이 가리워져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죽었던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으로 영을 낳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영의 사람이 되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세계인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영안(靈眼)을 열어 주시면 4차원의 세계도 볼 수 있게 되지요(행 7:56).
그런데 4차원인 영의 세계는 지식이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선지자나 주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무(無)로 돌리고 영에 속한 지식들로만 채워 나갔던 것입니다(빌 3:8). 또한 영으로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의 차이점
1) 육의 차원이 진화라면 영의 차원은 창조입니다
육의 세계는 썩고 변질되고 사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육의 차원에 익숙해진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모든 생물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저절로 진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생물이 진화로 말미암았고, 모든 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라면 어떻게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될 수 있겠고, 사시사철의 변화 등이 일정한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잘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주만물에 질서와 조화가 있고 완벽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을 볼 때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육으로 추측하여 진화를 주장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의 세계의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창조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육의 차원은 죽는 것이지만 영의 차원은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 되살아나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의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삼고 지켜 행해야 영이 살아갈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의 세계에서 썩어질 육의 양식을 먹고 살면 결국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영의 양식인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6:27).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육의 차원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악의 차원이니 결국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지만, 영의 차원은 선과 사랑의 차원이요, 희생의 차원이요, 영생으로 가는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이것을 신령한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육의 차원은 무(無)의 차원이고 영의 차원은 유(有)의 차원입니다
육의 차원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것뿐이기에 무(無)의 차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없는 것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유(有)의 차원입니다. 히브리서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도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영의 차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의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방법과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정확하게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에 들어와 영의 방법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든지 복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했을 때 중심에서 믿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니 결국 백 세에 독자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지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즉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곧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이처럼 육은 우리 눈에 보여야만 믿는 것이지만 영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는 것이기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육에 거함으로 영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의 사람을 오해하고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힘이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의 문제입니다. 즉 육의 사람은 육의 지식에서 비롯된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또한 마음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마음은 크고 아름다운 것이며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지만, 육의 마음은 자기 것만 알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죽어지고 낮아지며 섬기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욕심을 좇아 높아지려 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도무지 영의 사람들과 맞지 않으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육에 거하는 사람 편에서 마음이 악하므로 빛 앞에 자신의 악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악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찔림이 되니 큰 소리가 나고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에 속한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능히 마음으로 분별하고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령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4차원의 축복
육을 버리고 상대를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의 단계에 들어오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가 이해되고 4차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곧 진화가 아닌 창조의 역사를 믿을 수 있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게 되며, 무의 차원이 아니라 유의 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신 대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있는 사람이 영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처음에는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지나서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만 하면 범사에 형통하게 되니 영의 행복이 얼마나 온전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영에 거하는 사람은 능히 죽음도 이길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그만큼 권세가 주어지고, 구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찾으며, 두드리는 대로 열리니 부족할 것이 없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니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지고 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약속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을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육에 속해 있기 때문이요, 여전히 비진리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고집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신령한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믿음과 신앙의 성장 속도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이 오직 영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환경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결코 신령한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목표를 정했으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도전하되 변함없이 달려가야 하며 결코 늦추거나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가 깊은 수렁 가운데 빠진 듯한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비진리의 생각과 지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하시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육을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와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18
제7과상대를 위해 살라
마 5:39-41
읽을말씀 : 마 5:39-41 | 외울말씀 : 마 5:39
교육목표 :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독단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상대를 위해 희생하며 선을 행했던 사람은 참으로 형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룻,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한 에스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특히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해 나갔습니다. 윗사람이면서도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으며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주었지요.
이같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시며 범사에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를 하였으니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행함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선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만이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실 수 있고 사람은 상대의 마음 중심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했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밝은 엘리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니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서 남을 판단한다면 서로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더 발전하면 정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오직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수십 억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얼굴 생김새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다 다르며 손가락에 있는 지문까지도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른데 어찌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배우고 아는 것, 내 교양만이 가장 옳은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랑과 덕으로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판단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요. 만일 잘못 판단하면 불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주위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할지라도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 4:11을 통하여 판단 자체가 죄요,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판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판단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정죄란 어떤 것을 듣거나 보았을 때 자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배합하여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판단하여 전하고, 또한 전달받은 것을 자기 느낌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려 가니 정죄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가정이나 이웃, 친구 사이에도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수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주변에 남의 허물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상대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가 고통당하는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무리한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여유가 있는데도 상대가 부유해 보이니 도리어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요. 상대는 형편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악한 모습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잠언 28:27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했으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신을 도와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유익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니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도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깃들게 되며 오히려 상대편에서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도와주기를 자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행하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대로 모든 삶이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3. 자신의 권세로 남을 희생시키거나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직분자나 가정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라고 권세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질서에 따라서 조직의 안정을 이루고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 조직 안에서 법도와 질서를 좇되 항상 선 가운데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은 왕권을 잘못 사용하여 백성들을 심히 고통 속에 몰아넣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머리된 사람은 분명한 질서를 좇아야 하며 월권을 하거나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는 왕이 아니고 조직의 머리된 사람도 아니니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마다 환경은 다를지라도 마음의 근본 비진리의 속성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빼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상사를 놓고 이런저런 허물을 들춰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 서면 상대보다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리된 사람일수록 명예나 권세, 그리고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는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명하시며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을 사로잡아 오고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더 좋겠다' 하며 자기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편에서 현명하고 좋아 보이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엄연한 불순종이 됩니다. 계속하여 불순종을 더해 가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시달림을 받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비진리와 악의 모양까지 다 빼내 버리지 않으면 죄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권세를 얻거나 명예나 부를 얻게 되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있는 조그만 악의 뿌리라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는 권세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교만해져 얼마든지 사울 왕과 같은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변질될 수 있는 육의 모습은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5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으니 영적인 사랑으로 나의 유익보다는 내 형제의 유익,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를 위해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평안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독단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상대를 위해 희생하며 선을 행했던 사람은 참으로 형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룻,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한 에스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특히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해 나갔습니다. 윗사람이면서도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으며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주었지요.
이같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시며 범사에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를 하였으니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행함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선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만이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실 수 있고 사람은 상대의 마음 중심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했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밝은 엘리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니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서 남을 판단한다면 서로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더 발전하면 정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오직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수십 억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얼굴 생김새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다 다르며 손가락에 있는 지문까지도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른데 어찌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배우고 아는 것, 내 교양만이 가장 옳은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랑과 덕으로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판단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요. 만일 잘못 판단하면 불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주위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할지라도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 4:11을 통하여 판단 자체가 죄요,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판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판단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정죄란 어떤 것을 듣거나 보았을 때 자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배합하여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판단하여 전하고, 또한 전달받은 것을 자기 느낌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려 가니 정죄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가정이나 이웃, 친구 사이에도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수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주변에 남의 허물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상대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가 고통당하는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무리한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여유가 있는데도 상대가 부유해 보이니 도리어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요. 상대는 형편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악한 모습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잠언 28:27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했으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신을 도와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유익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니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도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깃들게 되며 오히려 상대편에서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도와주기를 자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행하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대로 모든 삶이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3. 자신의 권세로 남을 희생시키거나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직분자나 가정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라고 권세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질서에 따라서 조직의 안정을 이루고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 조직 안에서 법도와 질서를 좇되 항상 선 가운데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은 왕권을 잘못 사용하여 백성들을 심히 고통 속에 몰아넣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머리된 사람은 분명한 질서를 좇아야 하며 월권을 하거나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는 왕이 아니고 조직의 머리된 사람도 아니니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마다 환경은 다를지라도 마음의 근본 비진리의 속성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빼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상사를 놓고 이런저런 허물을 들춰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 서면 상대보다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리된 사람일수록 명예나 권세, 그리고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는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명하시며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을 사로잡아 오고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더 좋겠다' 하며 자기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편에서 현명하고 좋아 보이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엄연한 불순종이 됩니다. 계속하여 불순종을 더해 가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시달림을 받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비진리와 악의 모양까지 다 빼내 버리지 않으면 죄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권세를 얻거나 명예나 부를 얻게 되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있는 조그만 악의 뿌리라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는 권세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교만해져 얼마든지 사울 왕과 같은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변질될 수 있는 육의 모습은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5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으니 영적인 사랑으로 나의 유익보다는 내 형제의 유익,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를 위해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평안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11
제6과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누가복음 8:19-21
읽을말씀 : 누가복음 8:19-21 | 외울말씀 : 누가복음 8: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태복음 12:48-50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께 누군가 나아와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곧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육의 형제자매와 부모가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 땅의 육적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1. 참되고 영원한 영적인 가족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원수 마귀의 자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영적인 가족 관계는 이 땅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육적인 가족 관계와는 달리 영원한 천국에서도 계속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처음에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깨닫지 못하고 육의 가족들을 찾게 되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영안이 열리게 되면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귀히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형제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믿음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진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변화되어야 영적인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영적인 가족이 되려면
1)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영적인 가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피를 나눈 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영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요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도록 권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호되게 책망하고 내 가족은 감싸 주는 편협한 행함이 아니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관해서든 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더 옳은지 살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에서 떠난 마음이요, 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꾼을 쓰고자 할 때에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마음입니다.
2)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철저히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따져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시고 오직 화평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식적인 율법이 아니요, 바로 율법의 근본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위엄있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면서 자칭 의인이라 하나 마음속에 악을 감추고 있는 위선적인 그들의 모습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넘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3년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같이 생활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신하게 될 줄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3년간 동고동락한 수제자라 할지라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자기를 배신하게 될 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점을 보시고 후일에 성령을 받아 변화될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용납하셨고, 또한 가르치셔서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서야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 앞에 생명을 바치는 충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만 보고 인내하며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큰그릇됨이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비진리의 감정이 없으니 설령 멸시 천대와 모욕을 당하실지라도 아버지 앞에 받은 바 모든 사명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감당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마음이며, 이처럼 비진리의 감정을 버릴 때라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형제자매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준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가족이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 8:21)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섬기라 하셨으니 섬기는 사람이 되고, 낮아지라 하셨으니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진정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는 사람이 복되다 하셨으니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진정한 형제자매요, 하나님의 참자녀이며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영적인 일꾼이요 큰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지만 조카인 롯을 섬겨 주었고 땅을 선택할 때에도 오히려 양보하며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좇아간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출해 주기도 했지요. 이런 큰그릇이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고, 또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벗어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영적인 일꾼으로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태복음 12:48-50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께 누군가 나아와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곧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육의 형제자매와 부모가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 땅의 육적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1. 참되고 영원한 영적인 가족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원수 마귀의 자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영적인 가족 관계는 이 땅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육적인 가족 관계와는 달리 영원한 천국에서도 계속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처음에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깨닫지 못하고 육의 가족들을 찾게 되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영안이 열리게 되면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귀히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형제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믿음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진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변화되어야 영적인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영적인 가족이 되려면
1)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영적인 가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피를 나눈 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영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요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도록 권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호되게 책망하고 내 가족은 감싸 주는 편협한 행함이 아니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관해서든 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더 옳은지 살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에서 떠난 마음이요, 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꾼을 쓰고자 할 때에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마음입니다.
2)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철저히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따져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시고 오직 화평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식적인 율법이 아니요, 바로 율법의 근본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위엄있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면서 자칭 의인이라 하나 마음속에 악을 감추고 있는 위선적인 그들의 모습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넘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3년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같이 생활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신하게 될 줄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3년간 동고동락한 수제자라 할지라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자기를 배신하게 될 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점을 보시고 후일에 성령을 받아 변화될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용납하셨고, 또한 가르치셔서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서야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 앞에 생명을 바치는 충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만 보고 인내하며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큰그릇됨이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비진리의 감정이 없으니 설령 멸시 천대와 모욕을 당하실지라도 아버지 앞에 받은 바 모든 사명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감당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마음이며, 이처럼 비진리의 감정을 버릴 때라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형제자매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준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가족이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 8:21)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섬기라 하셨으니 섬기는 사람이 되고, 낮아지라 하셨으니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진정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는 사람이 복되다 하셨으니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진정한 형제자매요, 하나님의 참자녀이며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영적인 일꾼이요 큰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지만 조카인 롯을 섬겨 주었고 땅을 선택할 때에도 오히려 양보하며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좇아간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출해 주기도 했지요. 이런 큰그릇이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고, 또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벗어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영적인 일꾼으로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