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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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1
제10과천하에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나니
전 3:1-8
읽을말씀 : 전 3:1-8 | 외울말씀 : 전 3:1
교육목표 :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와 절제함 가운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범사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1. 절제의 열매의 필요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시지요.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고 언행이 거룩해지며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속히 이루어야 할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충성을 연관지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충성의 열매란 맡겨진 직무와 주어진 대가 이상을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일한다거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처럼 힘을 다하여 드리기를 기뻐하는 행함을 충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늘 쉴 새 없이 충성한다면 결국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므로 충성이라는 것도 쉼이 있는 충성이 되어야 하지요. 중간 중간에 쉼을 가짐으로 활력을 되찾아야 지치지 않고 계속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이며 절제가 있음으로 변함없이 아름답게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말씀하신 것도 절제의 열매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한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때를 말하는데 땅에 뿌린 씨가 싹이 나기까지 일정한 기한이 있는 것이고 또한 열매를 얻고자 목적한 바가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왜 이렇게 싹이 나지 않나?' 하고 파헤치다 보면 오히려 씨를 버리는 결과가 되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모든 것이 기한이 있고 목적한 바가 있으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지만, 정작 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100세 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2. 범사에 풍성하고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면
1) 기한과 목적,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기한과 목적, 때를 이룸에 있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기도가 좋아서 주 안에서 모이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하지 않고 늘상 교회에서 산다거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간증을 끊임없이 들려 줍니다.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범사에 가장 합당한 때를 분별하여 행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지혜롭게 주어진 목적이 달성되도록 해야 하고 더 나아가 때를 맞추어 잘 이루어야 합니다.
곧 기도회라든가, 교회 모임이라든가, 대화하고 전달하는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성령의 주관 속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알맞은 때에 행해져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일 범사에 목적과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만 가지고 무분별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매우 약한 것 같지만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제하거나 조심하다가 도무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주관을 받으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이렇게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가 필요합니다
국가적인 일이든, 사업터나 일터, 가정의 일이든 어떠한 일을 계획할 때에 좋은 방안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고의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계사, 또는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한에 맞게 어떤 목적한 바를 가지고 나갔다 할지라도 자칫 무리를 하다보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중종 임금 때에 조광조의 개혁이 그러했고, 중국 역사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통한 개혁이 그러했습니다. 옳고 좋은 일이라 해서 너무 급진적으로 밀고나갔다가 오히려 위협을 느낀 반대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아무 때든지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믿음을 심어 주시고 제자들을 기르시는 등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때가 이르러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없이 나타났고, 오히려 더 크게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있는 주의 종에게 기도받으면 무조건 응답받는 줄로 여기지만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정성을 내보이는 등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도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통해 죄를 벗어내야 하며 불같은 기도와 믿음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 생명으로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은혜를 입고 충만하다고 해서 무조건 마음에 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충만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절제하며 두루두루 모든 분야를 잘 이끌어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신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교회나 선교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성급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나 일꾼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연결시켜 주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쳐야 합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후계자로 삼고자 할 때 단번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겪으며 기초를 다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충만하고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범사에 기한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인내 속에서 두루두루 살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마음에 맞추어 선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고 성령이 충만하여 감동을 입게 되면 다 주고 싶고 좋은 일, 선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든지 다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되어 주기 원하지요. 이렇게 행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만함 가운데 무조건 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분별하게 돕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구약 성경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풍랑이 일어나고 급기야 뱃사람들이 배에 있는 물품들을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대풍이 왔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돕지 아니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며 구제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 병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잘 분별해서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교회를 세운다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를 못 맞추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면 복을 받을 수 없지요. 혹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복이 임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이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에 범사가 기한과 목적과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일에 항상 기한과 목적과 때를 맞추어 지혜롭게 행하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하고 절제함으로 아름답고 온전하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범사에 기한과 목적,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와 절제함 가운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범사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1. 절제의 열매의 필요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시지요.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고 언행이 거룩해지며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속히 이루어야 할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충성을 연관지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충성의 열매란 맡겨진 직무와 주어진 대가 이상을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중에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일한다거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처럼 힘을 다하여 드리기를 기뻐하는 행함을 충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늘 쉴 새 없이 충성한다면 결국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므로 충성이라는 것도 쉼이 있는 충성이 되어야 하지요. 중간 중간에 쉼을 가짐으로 활력을 되찾아야 지치지 않고 계속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이며 절제가 있음으로 변함없이 아름답게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말씀하신 것도 절제의 열매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한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때를 말하는데 땅에 뿌린 씨가 싹이 나기까지 일정한 기한이 있는 것이고 또한 열매를 얻고자 목적한 바가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루나 이틀이 지난 뒤에 '왜 이렇게 싹이 나지 않나?' 하고 파헤치다 보면 오히려 씨를 버리는 결과가 되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모든 것이 기한이 있고 목적한 바가 있으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지만, 정작 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100세 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지혜롭게 행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2. 범사에 풍성하고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면
1) 기한과 목적, 때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기한과 목적, 때를 이룸에 있어서도 그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기도가 좋아서 주 안에서 모이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하지 않고 늘상 교회에서 산다거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간증을 끊임없이 들려 줍니다.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범사에 가장 합당한 때를 분별하여 행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지혜롭게 주어진 목적이 달성되도록 해야 하고 더 나아가 때를 맞추어 잘 이루어야 합니다.
곧 기도회라든가, 교회 모임이라든가, 대화하고 전달하는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성령의 주관 속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알맞은 때에 행해져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일 범사에 목적과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만 가지고 무분별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매우 약한 것 같지만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제하거나 조심하다가 도무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주관을 받으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이렇게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내가 필요합니다
국가적인 일이든, 사업터나 일터, 가정의 일이든 어떠한 일을 계획할 때에 좋은 방안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고의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계사, 또는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한에 맞게 어떤 목적한 바를 가지고 나갔다 할지라도 자칫 무리를 하다보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중종 임금 때에 조광조의 개혁이 그러했고, 중국 역사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통한 개혁이 그러했습니다. 옳고 좋은 일이라 해서 너무 급진적으로 밀고나갔다가 오히려 위협을 느낀 반대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아무 때든지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으셨지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믿음을 심어 주시고 제자들을 기르시는 등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때가 이르러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없이 나타났고, 오히려 더 크게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있는 주의 종에게 기도받으면 무조건 응답받는 줄로 여기지만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정성을 내보이는 등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도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통해 죄를 벗어내야 하며 불같은 기도와 믿음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고 생명으로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은혜를 입고 충만하다고 해서 무조건 마음에 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충만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절제하며 두루두루 모든 분야를 잘 이끌어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신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교회나 선교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성급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나 일꾼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연결시켜 주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들을 거쳐야 합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후계자로 삼고자 할 때 단번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겪으며 기초를 다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충만하고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범사에 기한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인내 속에서 두루두루 살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마음에 맞추어 선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고 성령이 충만하여 감동을 입게 되면 다 주고 싶고 좋은 일, 선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든지 다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힘이 되어 주기 원하지요. 이렇게 행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만함 가운데 무조건 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분별하게 돕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구약 성경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가던 중 풍랑이 일어나고 급기야 뱃사람들이 배에 있는 물품들을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대풍이 왔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돕지 아니해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며 구제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 병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잘 분별해서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교회를 세운다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를 못 맞추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면 복을 받을 수 없지요. 혹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복이 임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신다면 이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에 범사가 기한과 목적과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일에 항상 기한과 목적과 때를 맞추어 지혜롭게 행하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내하고 절제함으로 아름답고 온전하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3-04
제9과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고후 10:18
읽을말씀 : 고후 10:18 | 외울말씀 : 고후 10: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주께 칭찬을 받으며 범사에 형통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체가 이웃에게 뭔가 귀감이 되거나 덕이 되며 은혜를 끼칠 만한 것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덕을 세우고 이웃에게 기림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성경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이 드러나고 알려지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민망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나오는 바르실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왕궁을 떠나 쫓기고 있던 때에 다윗 왕과 그의 군대에게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반란이 진정된 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던 다윗 왕은 그에게 동행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는데, 이때 바르실래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고 좋은 말로 정중히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선한 마음이니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왕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참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평소 행하지 않던 선한 일을 어쩌다가 한 번 행하기라도 하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사람 앞에 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행한 선행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고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인지, 아니면 외식인지를 깨달아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벗어 버려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려면
1) 상대가 지키지 못한다 해서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나갈 때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의 티가 보이니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상대편에서 물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사명이나 의무가 있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설명해 줌으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할 따름이지 나무라거나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중심에서 지적 받기를 사모하며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부득불 지적할 수 있지요.
만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머리되고 일꾼된 분일수록, 그리고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보 단계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삼가 주의해야 하지요.
우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약 4:11) 언행 가운데 지적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의 티를 잡고 싶은 마음까지라도 철저히 버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의와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남을 지적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티가 보이겠습니까? 설령 보인다 해도 보이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며, 더구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티를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시하는 일이지요. 마음에 온전한 섬김이 있다면 그저 상대의 좋은 점만 보려 하고 좋은 점만 말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거나 들레지 않으니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마 12:19-20).
따라서 자신이 지킨다고 해서 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아니하며 피차에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노하고 감정 표현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늘 부담스럽고 긴장을 하게 되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은 자신의 일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윗사람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아랫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성격이 모나고 혹 부족하여 내 생각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질서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서로가 합력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윗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본적인 틀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18).
아랫사람이 아무리 부림을 당한다 해도 마음이 선하면 고통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선하다 하여 윗사람이 무례히 행하거나 지적하고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피차간에 무엇을 말할 때나 권면할 때, 또 무엇을 전할 때에도 가르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섬기는 마음으로, 다만 아는 것을 말하려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간에 섬김의 마음이 없으면 상대로 인해 불편해지고 때로 분을 내거나 악한 말을 하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아픔을 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1:19-20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고 눌러 참았다가 나중에 성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보기에는 성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성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이러한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빼낼 때, 크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쁜 일을 만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그릇이요, 작은 마음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칭찬을 듣거나 지적을 받을 때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소인은 열 가지 칭찬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자체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기뻐하지만, 대인은 열 가지 칭찬을 다 참조는 하되 그중에서 자신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칭찬받을 일로 칭찬을 받았다면 그것은 묻어 두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개선할 점을 발견하여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일이라면 중심에서 사양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소인은 열 가지 지적을 받으면 열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힘을 잃고 주저앉지만 대인은 지적해 준 자체는 감사하니 참조는 하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좇아 더 발전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개선해 나가게 되지요.
성경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지칭하신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좇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고넬료, 보아스 같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나 쌓은 지식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덕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과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는다 해도 의기소침해하거나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돌아보아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버릴 것은 버려 나가야 합니다.
4) 마음에 서운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애매히 고통을 주는 말,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서운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계속하여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에 신복들은 당장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노라고 격분했지만 다윗 왕은 내버려 두라고 만류하지요(삼하 16장).
만일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을 소유했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초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사무엘하 16:12을 보면 다윗 왕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지요. 상대가 나를 저주하는데 그에 맞서 앙갚음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나를 저주했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선으로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큰 사람은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며 범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대인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며 좋은 행함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함으로 주께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주께 칭찬을 받으며 범사에 형통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체가 이웃에게 뭔가 귀감이 되거나 덕이 되며 은혜를 끼칠 만한 것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덕을 세우고 이웃에게 기림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성경을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이 드러나고 알려지면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민망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나오는 바르실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신하들의 배신으로 왕궁을 떠나 쫓기고 있던 때에 다윗 왕과 그의 군대에게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반란이 진정된 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던 다윗 왕은 그에게 동행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는데, 이때 바르실래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고 좋은 말로 정중히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선한 마음이니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왕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참으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평소 행하지 않던 선한 일을 어쩌다가 한 번 행하기라도 하면,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사람 앞에 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행한 선행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고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마음에 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인지, 아니면 외식인지를 깨달아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벗어 버려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려면
1) 상대가 지키지 못한다 해서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나갈 때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의 티가 보이니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상대편에서 물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사명이나 의무가 있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설명해 줌으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할 따름이지 나무라거나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중심에서 지적 받기를 사모하며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부득불 지적할 수 있지요.
만일 내가 지킨다고 해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머리되고 일꾼된 분일수록, 그리고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보 단계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삼가 주의해야 하지요.
우리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약 4:11) 언행 가운데 지적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의 티를 잡고 싶은 마음까지라도 철저히 버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의와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지키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남을 지적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티가 보이겠습니까? 설령 보인다 해도 보이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며, 더구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티를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시하는 일이지요. 마음에 온전한 섬김이 있다면 그저 상대의 좋은 점만 보려 하고 좋은 점만 말하려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세우거나 들레지 않으니 부딪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마 12:19-20).
따라서 자신이 지킨다고 해서 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아니하며 피차에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노하고 감정 표현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늘 부담스럽고 긴장을 하게 되지요. 더구나 질서상 윗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은 자신의 일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윗사람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힘들어하는 아랫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성격이 모나고 혹 부족하여 내 생각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직과 질서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서로가 합력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윗사람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해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기본적인 틀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18).
아랫사람이 아무리 부림을 당한다 해도 마음이 선하면 고통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이 선하다 하여 윗사람이 무례히 행하거나 지적하고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피차간에 무엇을 말할 때나 권면할 때, 또 무엇을 전할 때에도 가르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섬기는 마음으로, 다만 아는 것을 말하려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간에 섬김의 마음이 없으면 상대로 인해 불편해지고 때로 분을 내거나 악한 말을 하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아픔을 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1:19-20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고 눌러 참았다가 나중에 성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보기에는 성내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성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 이러한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빼낼 때, 크고 온유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쁜 일을 만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그릇이요, 작은 마음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칭찬을 듣거나 지적을 받을 때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소인은 열 가지 칭찬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자체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기뻐하지만, 대인은 열 가지 칭찬을 다 참조는 하되 그중에서 자신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 몇 가지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칭찬받을 일로 칭찬을 받았다면 그것은 묻어 두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개선할 점을 발견하여 개선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그 칭찬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일이라면 중심에서 사양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소인은 열 가지 지적을 받으면 열 가지를 다 생각하면서 힘을 잃고 주저앉지만 대인은 지적해 준 자체는 감사하니 참조는 하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좇아 더 발전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개선해 나가게 되지요.
성경상에서도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지칭하신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좇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고넬료, 보아스 같은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지위나 쌓은 지식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덕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과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는다 해도 의기소침해하거나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돌아보아 돌이킬 것은 돌이키고 버릴 것은 버려 나가야 합니다.
4) 마음에 서운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가 애매히 고통을 주는 말, 또는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서운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다가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계속하여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에 신복들은 당장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노라고 격분했지만 다윗 왕은 내버려 두라고 만류하지요(삼하 16장).
만일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을 소유했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초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상황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사무엘하 16:12을 보면 다윗 왕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지요. 상대가 나를 저주하는데 그에 맞서 앙갚음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나를 저주했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선으로 갚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큰 사람은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것을 생각하며 범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대인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며 좋은 행함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주님의 마음이 되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함으로 주께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25
제8과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고전 2:13-16
읽을말씀 : 고전 2:13-16 | 외울말씀 : 고전 2:13
교육목표 : 육과 영의 차원을 비교하면서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4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사람의 영과 4차원 세계의 영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게 된 인류는 영원히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영이란 '죄성이 없는 깨끗한 상태의 마음'으로, 영이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 영이 가리워져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죽었던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으로 영을 낳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영의 사람이 되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세계인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영안(靈眼)을 열어 주시면 4차원의 세계도 볼 수 있게 되지요(행 7:56).
그런데 4차원인 영의 세계는 지식이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선지자나 주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무(無)로 돌리고 영에 속한 지식들로만 채워 나갔던 것입니다(빌 3:8). 또한 영으로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의 차이점
1) 육의 차원이 진화라면 영의 차원은 창조입니다
육의 세계는 썩고 변질되고 사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육의 차원에 익숙해진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모든 생물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저절로 진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생물이 진화로 말미암았고, 모든 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라면 어떻게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될 수 있겠고, 사시사철의 변화 등이 일정한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잘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주만물에 질서와 조화가 있고 완벽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을 볼 때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육으로 추측하여 진화를 주장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의 세계의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창조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육의 차원은 죽는 것이지만 영의 차원은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 되살아나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의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삼고 지켜 행해야 영이 살아갈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의 세계에서 썩어질 육의 양식을 먹고 살면 결국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영의 양식인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6:27).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육의 차원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악의 차원이니 결국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지만, 영의 차원은 선과 사랑의 차원이요, 희생의 차원이요, 영생으로 가는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이것을 신령한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육의 차원은 무(無)의 차원이고 영의 차원은 유(有)의 차원입니다
육의 차원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것뿐이기에 무(無)의 차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없는 것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유(有)의 차원입니다. 히브리서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도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영의 차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의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방법과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정확하게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에 들어와 영의 방법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든지 복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했을 때 중심에서 믿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니 결국 백 세에 독자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지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즉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곧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이처럼 육은 우리 눈에 보여야만 믿는 것이지만 영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는 것이기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육에 거함으로 영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의 사람을 오해하고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힘이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의 문제입니다. 즉 육의 사람은 육의 지식에서 비롯된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또한 마음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마음은 크고 아름다운 것이며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지만, 육의 마음은 자기 것만 알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죽어지고 낮아지며 섬기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욕심을 좇아 높아지려 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도무지 영의 사람들과 맞지 않으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육에 거하는 사람 편에서 마음이 악하므로 빛 앞에 자신의 악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악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찔림이 되니 큰 소리가 나고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에 속한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능히 마음으로 분별하고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령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4차원의 축복
육을 버리고 상대를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의 단계에 들어오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가 이해되고 4차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곧 진화가 아닌 창조의 역사를 믿을 수 있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게 되며, 무의 차원이 아니라 유의 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신 대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있는 사람이 영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처음에는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지나서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만 하면 범사에 형통하게 되니 영의 행복이 얼마나 온전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영에 거하는 사람은 능히 죽음도 이길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그만큼 권세가 주어지고, 구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찾으며, 두드리는 대로 열리니 부족할 것이 없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니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지고 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약속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을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육에 속해 있기 때문이요, 여전히 비진리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고집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신령한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믿음과 신앙의 성장 속도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이 오직 영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환경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결코 신령한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목표를 정했으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도전하되 변함없이 달려가야 하며 결코 늦추거나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가 깊은 수렁 가운데 빠진 듯한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비진리의 생각과 지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하시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육을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와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육과 영의 차원을 비교하면서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4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1. 사람의 영과 4차원 세계의 영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영이 죽게 된 인류는 영원히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영이란 '죄성이 없는 깨끗한 상태의 마음'으로, 영이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 영이 가리워져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죽었던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으로 영을 낳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영의 사람이 되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의 세계인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영안(靈眼)을 열어 주시면 4차원의 세계도 볼 수 있게 되지요(행 7:56).
그런데 4차원인 영의 세계는 지식이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선지자나 주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무(無)로 돌리고 영에 속한 지식들로만 채워 나갔던 것입니다(빌 3:8). 또한 영으로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의 차이점
1) 육의 차원이 진화라면 영의 차원은 창조입니다
육의 세계는 썩고 변질되고 사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육의 차원에 익숙해진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모든 생물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저절로 진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생물이 진화로 말미암았고, 모든 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라면 어떻게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될 수 있겠고, 사시사철의 변화 등이 일정한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잘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주만물에 질서와 조화가 있고 완벽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을 볼 때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육으로 추측하여 진화를 주장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의 세계의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창조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육의 차원은 죽는 것이지만 영의 차원은 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 되살아나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의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삼고 지켜 행해야 영이 살아갈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의 세계에서 썩어질 육의 양식을 먹고 살면 결국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영의 양식인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6:27).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육의 차원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악의 차원이니 결국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지만, 영의 차원은 선과 사랑의 차원이요, 희생의 차원이요, 영생으로 가는 생명의 차원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데 이것을 신령한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육의 차원은 무(無)의 차원이고 영의 차원은 유(有)의 차원입니다
육의 차원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 것뿐이기에 무(無)의 차원이라 합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없는 것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유(有)의 차원입니다. 히브리서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도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영의 차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의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방법과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정확하게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에 들어와 영의 방법을 좇아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든지 복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했을 때 중심에서 믿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니 결국 백 세에 독자 이삭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지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즉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곧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이처럼 육은 우리 눈에 보여야만 믿는 것이지만 영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는 것이기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육에 거함으로 영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의 사람을 오해하고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힘이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의 문제입니다. 즉 육의 사람은 육의 지식에서 비롯된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또한 마음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마음은 크고 아름다운 것이며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지만, 육의 마음은 자기 것만 알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죽어지고 낮아지며 섬기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욕심을 좇아 높아지려 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도무지 영의 사람들과 맞지 않으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육에 거하는 사람 편에서 마음이 악하므로 빛 앞에 자신의 악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 악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찔림이 되니 큰 소리가 나고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에 속한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능히 마음으로 분별하고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령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4차원의 축복
육을 버리고 상대를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의 단계에 들어오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가 이해되고 4차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곧 진화가 아닌 창조의 역사를 믿을 수 있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게 되며, 무의 차원이 아니라 유의 차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신 대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있는 사람이 영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처음에는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지나서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만 하면 범사에 형통하게 되니 영의 행복이 얼마나 온전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영에 거하는 사람은 능히 죽음도 이길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그만큼 권세가 주어지고, 구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찾으며, 두드리는 대로 열리니 부족할 것이 없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니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지고 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약속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을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육에 속해 있기 때문이요, 여전히 비진리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고집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신령한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믿음과 신앙의 성장 속도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이 오직 영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환경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결코 신령한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 목표를 정했으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도전하되 변함없이 달려가야 하며 결코 늦추거나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가 깊은 수렁 가운데 빠진 듯한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비진리의 생각과 지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하시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육을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와 신령한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18
제7과상대를 위해 살라
마 5:39-41
읽을말씀 : 마 5:39-41 | 외울말씀 : 마 5:39
교육목표 :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독단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상대를 위해 희생하며 선을 행했던 사람은 참으로 형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룻,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한 에스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특히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해 나갔습니다. 윗사람이면서도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으며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주었지요.
이같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시며 범사에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를 하였으니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행함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선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만이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실 수 있고 사람은 상대의 마음 중심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했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밝은 엘리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니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서 남을 판단한다면 서로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더 발전하면 정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오직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수십 억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얼굴 생김새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다 다르며 손가락에 있는 지문까지도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른데 어찌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배우고 아는 것, 내 교양만이 가장 옳은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랑과 덕으로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판단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요. 만일 잘못 판단하면 불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주위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할지라도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 4:11을 통하여 판단 자체가 죄요,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판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판단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정죄란 어떤 것을 듣거나 보았을 때 자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배합하여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판단하여 전하고, 또한 전달받은 것을 자기 느낌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려 가니 정죄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가정이나 이웃, 친구 사이에도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수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주변에 남의 허물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상대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가 고통당하는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무리한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여유가 있는데도 상대가 부유해 보이니 도리어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요. 상대는 형편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악한 모습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잠언 28:27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했으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신을 도와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유익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니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도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깃들게 되며 오히려 상대편에서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도와주기를 자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행하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대로 모든 삶이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3. 자신의 권세로 남을 희생시키거나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직분자나 가정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라고 권세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질서에 따라서 조직의 안정을 이루고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 조직 안에서 법도와 질서를 좇되 항상 선 가운데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은 왕권을 잘못 사용하여 백성들을 심히 고통 속에 몰아넣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머리된 사람은 분명한 질서를 좇아야 하며 월권을 하거나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는 왕이 아니고 조직의 머리된 사람도 아니니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마다 환경은 다를지라도 마음의 근본 비진리의 속성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빼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상사를 놓고 이런저런 허물을 들춰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 서면 상대보다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리된 사람일수록 명예나 권세, 그리고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는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명하시며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을 사로잡아 오고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더 좋겠다' 하며 자기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편에서 현명하고 좋아 보이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엄연한 불순종이 됩니다. 계속하여 불순종을 더해 가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시달림을 받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비진리와 악의 모양까지 다 빼내 버리지 않으면 죄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권세를 얻거나 명예나 부를 얻게 되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있는 조그만 악의 뿌리라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는 권세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교만해져 얼마든지 사울 왕과 같은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변질될 수 있는 육의 모습은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5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으니 영적인 사랑으로 나의 유익보다는 내 형제의 유익,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를 위해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평안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독단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상대를 위해 희생하며 선을 행했던 사람은 참으로 형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던 룻,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한 에스더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특히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해 나갔습니다. 윗사람이면서도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였으며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주었지요.
이같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시며 범사에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를 하였으니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행함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선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만이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실 수 있고 사람은 상대의 마음 중심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했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밝은 엘리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니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서 남을 판단한다면 서로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더 발전하면 정죄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오직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수십 억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얼굴 생김새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다 다르며 손가락에 있는 지문까지도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른데 어찌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배우고 아는 것, 내 교양만이 가장 옳은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랑과 덕으로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판단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요. 만일 잘못 판단하면 불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주위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할지라도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 4:11을 통하여 판단 자체가 죄요,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 재판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판단하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정죄란 어떤 것을 듣거나 보았을 때 자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배합하여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판단하여 전하고, 또한 전달받은 것을 자기 느낌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려 가니 정죄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가정이나 이웃, 친구 사이에도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수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주변에 남의 허물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상대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가 고통당하는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무리한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여유가 있는데도 상대가 부유해 보이니 도리어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요. 상대는 형편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악한 모습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잠언 28:27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했으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신을 도와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유익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니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도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깃들게 되며 오히려 상대편에서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도와주기를 자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행하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대로 모든 삶이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입니다.
3. 자신의 권세로 남을 희생시키거나 상대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직분자나 가정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라고 권세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질서에 따라서 조직의 안정을 이루고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 조직 안에서 법도와 질서를 좇되 항상 선 가운데 좇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은 왕권을 잘못 사용하여 백성들을 심히 고통 속에 몰아넣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머리된 사람은 분명한 질서를 좇아야 하며 월권을 하거나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는 왕이 아니고 조직의 머리된 사람도 아니니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마다 환경은 다를지라도 마음의 근본 비진리의 속성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빼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상사를 놓고 이런저런 허물을 들춰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 서면 상대보다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리된 사람일수록 명예나 권세, 그리고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는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명하시며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을 사로잡아 오고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더 좋겠다' 하며 자기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편에서 현명하고 좋아 보이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엄연한 불순종이 됩니다. 계속하여 불순종을 더해 가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시달림을 받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비진리와 악의 모양까지 다 빼내 버리지 않으면 죄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권세를 얻거나 명예나 부를 얻게 되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있는 조그만 악의 뿌리라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는 권세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교만해져 얼마든지 사울 왕과 같은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변질될 수 있는 육의 모습은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5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으니 영적인 사랑으로 나의 유익보다는 내 형제의 유익,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를 위해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평안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11
제6과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누가복음 8:19-21
읽을말씀 : 누가복음 8:19-21 | 외울말씀 : 누가복음 8: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태복음 12:48-50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께 누군가 나아와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곧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육의 형제자매와 부모가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 땅의 육적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1. 참되고 영원한 영적인 가족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원수 마귀의 자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영적인 가족 관계는 이 땅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육적인 가족 관계와는 달리 영원한 천국에서도 계속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처음에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깨닫지 못하고 육의 가족들을 찾게 되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영안이 열리게 되면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귀히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형제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믿음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진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변화되어야 영적인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영적인 가족이 되려면
1)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영적인 가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피를 나눈 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영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요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도록 권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호되게 책망하고 내 가족은 감싸 주는 편협한 행함이 아니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관해서든 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더 옳은지 살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에서 떠난 마음이요, 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꾼을 쓰고자 할 때에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마음입니다.
2)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철저히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따져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시고 오직 화평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식적인 율법이 아니요, 바로 율법의 근본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위엄있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면서 자칭 의인이라 하나 마음속에 악을 감추고 있는 위선적인 그들의 모습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넘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3년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같이 생활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신하게 될 줄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3년간 동고동락한 수제자라 할지라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자기를 배신하게 될 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점을 보시고 후일에 성령을 받아 변화될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용납하셨고, 또한 가르치셔서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서야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 앞에 생명을 바치는 충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만 보고 인내하며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큰그릇됨이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비진리의 감정이 없으니 설령 멸시 천대와 모욕을 당하실지라도 아버지 앞에 받은 바 모든 사명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감당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마음이며, 이처럼 비진리의 감정을 버릴 때라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형제자매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준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가족이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 8:21)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섬기라 하셨으니 섬기는 사람이 되고, 낮아지라 하셨으니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진정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는 사람이 복되다 하셨으니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진정한 형제자매요, 하나님의 참자녀이며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영적인 일꾼이요 큰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지만 조카인 롯을 섬겨 주었고 땅을 선택할 때에도 오히려 양보하며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좇아간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출해 주기도 했지요. 이런 큰그릇이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고, 또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벗어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영적인 일꾼으로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태복음 12:48-50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께 누군가 나아와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곧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육의 형제자매와 부모가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 땅의 육적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1. 참되고 영원한 영적인 가족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사단의 사주를 받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원수 마귀의 자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영적인 가족 관계는 이 땅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육적인 가족 관계와는 달리 영원한 천국에서도 계속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처음에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깨닫지 못하고 육의 가족들을 찾게 되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영안이 열리게 되면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귀히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형제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믿음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진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변화되어야 영적인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영적인 가족이 되려면
1)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영적인 가족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피를 나눈 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영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요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도록 권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호되게 책망하고 내 가족은 감싸 주는 편협한 행함이 아니라 항상 같은 마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관해서든 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더 옳은지 살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에서 떠난 마음이요, 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꾼을 쓰고자 할 때에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마음입니다.
2)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철저히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따져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시고 오직 화평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식적인 율법이 아니요, 바로 율법의 근본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위엄있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면서 자칭 의인이라 하나 마음속에 악을 감추고 있는 위선적인 그들의 모습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넘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3년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같이 생활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신하게 될 줄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3년간 동고동락한 수제자라 할지라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자기를 배신하게 될 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점을 보시고 후일에 성령을 받아 변화될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용납하셨고, 또한 가르치셔서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서야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 앞에 생명을 바치는 충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만 보고 인내하며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큰그릇됨이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비진리의 감정이 없으니 설령 멸시 천대와 모욕을 당하실지라도 아버지 앞에 받은 바 모든 사명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감당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마음이며, 이처럼 비진리의 감정을 버릴 때라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형제자매요,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준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가족이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 8:21)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섬기라 하셨으니 섬기는 사람이 되고, 낮아지라 하셨으니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진정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는 사람이 복되다 하셨으니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진정한 형제자매요, 하나님의 참자녀이며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영적인 일꾼이요 큰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이지만 조카인 롯을 섬겨 주었고 땅을 선택할 때에도 오히려 양보하며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좇아간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출해 주기도 했지요. 이런 큰그릇이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고, 또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마음에서 육적인 감정을 벗어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영적인 일꾼으로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2-04
제5과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리라
마 13:49-50
읽을말씀 : 마 13:49-50 | 외울말씀 : 마 13:49-50
교육목표 :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여 영과 육을 구분함으로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야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듯이 주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악을 버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49-50을 통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혹여 내가 의인인줄 알았는데 악인은 아닌가?' 점검하면서 영과 육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의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분이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도 이런 악이 있었구나!' 깨우치며 철저히 육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는 의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과 우리아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어느 날 저녁, 다윗 왕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동하여 데려와 동침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가 전쟁터로 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혼자 집에 가서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신복들과 더불어 잠을 잤지요.
다윗 왕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우리아 편으로 전쟁터에 있는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었지요. 우리아를 전선의 최전방에 앞세워 전사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만한 중심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니 이를 감추기 위해 소인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아는 왕을 섬기는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충성하고자 육적인 정과 욕심을 끊고 마음을 지킴으로써 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아가 다윗 왕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 있어 죄를 범하니 그 죄로 인해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가 없으면 대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 뜻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진리로 비춰 보아 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면, 즉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살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21-22).
결국 다윗 왕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으로 엄청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를 통해 얻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쫓겨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어 가는 등 철저한 연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큰사람일수록 티끌 같은 죄라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큰사람에게는 티끌 같은 죄라도 무서운 것이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괴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소인배의 여러 가지 유형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무고한 백성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악한 궤계를 꾸몄지요. 바로 비류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 나봇에게 누명을 씌운 다음 돌에 쳐 죽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비류란 악한 일을 일삼는 무뢰한이나 깡패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 증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높은 직책의 사람 등과 가까이 하려고 힘쓰며 그들의 모임에 함께하여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르호보암 왕의 친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왕을 등에 업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며 즐거움을 취하고자 했던 이들은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아와 과중한 세금과 노역을 경감시켜 주기를 청할 때에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라는 악한 말로 대응하도록 사주합니다(왕상 12:10-11).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낳고 말았지요.
반면에 대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공직하고 정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해 돌아오는 분깃대로 복을 누리며 그 속에서 의의 행동을 취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일터, 사업터 등 각종 조직 안에서 각각 자기의 본분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나와 가까운 사람이 권세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덕을 입으려 한다거나 더불어 높임을 받으려 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주인의 명예나 권세를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러한 예는 성경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들 수 있습니다. 한낱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하갈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행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조차 누리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이러한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변화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질서와 순리를 좇아 모든 일을 정당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큰 인물들의 수하에서 아랫 사람들 간에 "누구 상전이 높으냐" 하며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에게 심히 누를 끼치는 행동으로 대인의 마음이 아닌 소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윗사람을 섬길 때는 자기 위치 속에서 정도를 좇아 행해야 하며, 소인의 마음으로 유명 인사나 권세가들 사이를 오가면서 함께 높은 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세가 사이에서 그들의 품위를 닮고 교양을 배워 자신을 덧입힌다 해도 그 마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영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섬기다 보면 말하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자연히 그 사람의 행함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외모와 행함을 닮아 겉으로는 온전한 것 같아도 그 중심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여전히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의인 중에 악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지식이 있고 의인의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에 의를 이루지 않으면 참된 의인이라 할 수 없으니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 자신에게 소인의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그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3.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증거는 소인배의 행동
그러면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소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대인답게 보이려고 행동하기 때문에 혹 눈에 보기에는 모양새가 좋고 큰사람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때에 따라 악함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결과가 소인배임을 증거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누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거나 감정을 건드리면 용납하지 아니하고 바로 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 또는 유익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근본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인인 체, 온유하고 교양 있는 체했는데 극한 상황이 되면 혈기를 내거나 악을 발함으로 소인배의 그릇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성경상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그는 왕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이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근본 마음이 소인이었으므로 사울 왕은 계속해서 악을 행하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지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상대에 대해 미움을 갖게 되면 마음에 품고 있다가 계획을 세워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악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의인인 것처럼 꾸미고 행할지라도 실상은 의인이 아닐 경우, 말씀으로 조명해 보면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의인 중에 악인이란 어떤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경우의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제삼자가 볼 때 겉모양새는 참으로 좋은 대인의 모습이요, 훌륭한 귀인의 상으로 보여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인들과 함께 오갈 수 있는 관계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위급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친분을 유지하면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인이나 귀인들과 함께 있으니 본인도 심중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위치에서 의인과 만나고 함께하는 가운데 자신이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기 계획 속에서 일들을 이루어 내고 그것에 대해 칭찬 듣기를 원하며, 자기의 유익을 좇아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을 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같지만 진정한 의인이 되지 못하며, 삯을 바라는 사람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삯을 바라다가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였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바로 그런 예로서, 이런 소인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은혜를 저버리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의인의 모습과 악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분별하기 어려운 몇 가지 예를 들었으니 잘 양식삼고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또한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 7:16-18에 말씀한 대로 아무리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하다면 의인의 옷을 입은 악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소인배의 감정을 벗어 내고 큰마음과 의롭고 진실한 모습으로 참된 의인에 대열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여 영과 육을 구분함으로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야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듯이 주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악을 버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49-50을 통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혹여 내가 의인인줄 알았는데 악인은 아닌가?' 점검하면서 영과 육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의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분이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도 이런 악이 있었구나!' 깨우치며 철저히 육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는 의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과 우리아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어느 날 저녁, 다윗 왕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동하여 데려와 동침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가 전쟁터로 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혼자 집에 가서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신복들과 더불어 잠을 잤지요.
다윗 왕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우리아 편으로 전쟁터에 있는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었지요. 우리아를 전선의 최전방에 앞세워 전사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만한 중심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니 이를 감추기 위해 소인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아는 왕을 섬기는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충성하고자 육적인 정과 욕심을 끊고 마음을 지킴으로써 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아가 다윗 왕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 있어 죄를 범하니 그 죄로 인해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가 없으면 대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 뜻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진리로 비춰 보아 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면, 즉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살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21-22).
결국 다윗 왕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으로 엄청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를 통해 얻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쫓겨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어 가는 등 철저한 연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큰사람일수록 티끌 같은 죄라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큰사람에게는 티끌 같은 죄라도 무서운 것이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괴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소인배의 여러 가지 유형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무고한 백성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악한 궤계를 꾸몄지요. 바로 비류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 나봇에게 누명을 씌운 다음 돌에 쳐 죽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비류란 악한 일을 일삼는 무뢰한이나 깡패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 증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높은 직책의 사람 등과 가까이 하려고 힘쓰며 그들의 모임에 함께하여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르호보암 왕의 친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왕을 등에 업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며 즐거움을 취하고자 했던 이들은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아와 과중한 세금과 노역을 경감시켜 주기를 청할 때에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라는 악한 말로 대응하도록 사주합니다(왕상 12:10-11).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낳고 말았지요.
반면에 대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공직하고 정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해 돌아오는 분깃대로 복을 누리며 그 속에서 의의 행동을 취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일터, 사업터 등 각종 조직 안에서 각각 자기의 본분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나와 가까운 사람이 권세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덕을 입으려 한다거나 더불어 높임을 받으려 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주인의 명예나 권세를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러한 예는 성경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들 수 있습니다. 한낱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하갈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행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조차 누리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이러한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변화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질서와 순리를 좇아 모든 일을 정당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큰 인물들의 수하에서 아랫 사람들 간에 "누구 상전이 높으냐" 하며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에게 심히 누를 끼치는 행동으로 대인의 마음이 아닌 소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윗사람을 섬길 때는 자기 위치 속에서 정도를 좇아 행해야 하며, 소인의 마음으로 유명 인사나 권세가들 사이를 오가면서 함께 높은 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세가 사이에서 그들의 품위를 닮고 교양을 배워 자신을 덧입힌다 해도 그 마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영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섬기다 보면 말하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자연히 그 사람의 행함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외모와 행함을 닮아 겉으로는 온전한 것 같아도 그 중심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여전히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의인 중에 악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지식이 있고 의인의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에 의를 이루지 않으면 참된 의인이라 할 수 없으니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 자신에게 소인의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그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3.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증거는 소인배의 행동
그러면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소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대인답게 보이려고 행동하기 때문에 혹 눈에 보기에는 모양새가 좋고 큰사람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때에 따라 악함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결과가 소인배임을 증거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누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거나 감정을 건드리면 용납하지 아니하고 바로 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 또는 유익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근본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인인 체, 온유하고 교양 있는 체했는데 극한 상황이 되면 혈기를 내거나 악을 발함으로 소인배의 그릇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성경상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그는 왕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이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근본 마음이 소인이었으므로 사울 왕은 계속해서 악을 행하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지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상대에 대해 미움을 갖게 되면 마음에 품고 있다가 계획을 세워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악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의인인 것처럼 꾸미고 행할지라도 실상은 의인이 아닐 경우, 말씀으로 조명해 보면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의인 중에 악인이란 어떤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경우의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제삼자가 볼 때 겉모양새는 참으로 좋은 대인의 모습이요, 훌륭한 귀인의 상으로 보여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인들과 함께 오갈 수 있는 관계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위급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친분을 유지하면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인이나 귀인들과 함께 있으니 본인도 심중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위치에서 의인과 만나고 함께하는 가운데 자신이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기 계획 속에서 일들을 이루어 내고 그것에 대해 칭찬 듣기를 원하며, 자기의 유익을 좇아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을 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같지만 진정한 의인이 되지 못하며, 삯을 바라는 사람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삯을 바라다가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였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바로 그런 예로서, 이런 소인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은혜를 저버리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의인의 모습과 악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분별하기 어려운 몇 가지 예를 들었으니 잘 양식삼고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또한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 7:16-18에 말씀한 대로 아무리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하다면 의인의 옷을 입은 악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소인배의 감정을 벗어 내고 큰마음과 의롭고 진실한 모습으로 참된 의인에 대열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28
제4과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읽을말씀 : 사 55:8-9 | 외울말씀 : 사 55:8-9
교육목표 :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달아 영과 육을 분별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야 만사형통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 지식이나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때에 맞게 바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해 쓰임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은 그 모략이 뛰어나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그도 함께 배반하여 압살롬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지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미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함께하시지 않으며, 결국 압살롬이 싸움에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윗에게 잡혀 죽느니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앞일을 예측할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선 가운데 행하지 않음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열왕기상·하에도 보면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권을 탈취한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결말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식이나 경험, 힘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각종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경우, 애굽의 왕자로서 많은 문물과 지식을 익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연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 지혜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이었지요.
2.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려면
세상에는 나름대로 경험도 있고 지식도 뛰어나지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상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그 방법을 가르침받기도 쉽지 않지요. 단순히 경험 또는 연단을 통해 '이것이 옳았구나' 아니면 '실수였구나' 하는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해결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분별치 못할 것이 없고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개선하면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자'(마 23:11)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자'(마 18:4)라고 말씀하시며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탓한다면 이는 큰 그릇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도 못하고 상대를 포용하지도 못하므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지요. 반면에 섬기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그릇이기에 마음먹은 대로 큰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0-21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귀한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날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 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존귀하게 여김받는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로, 변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변개함 없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금처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람들, 곧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빛의 열매, 그리고 팔복,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이 잉태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동정녀 마리아,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드렸던 막달라 마리아,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 등은 하나님께서 소중한 그릇으로 여기셨습니다.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람은 그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며 옥토와도 같아서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줍니다. 그 마음이 선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 안에서 품어 주고, 상대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던 아브라함 등이 이에 속합니다.
넷째로, 귀한 그릇입니다.
귀한 그릇은 쉽게 만들 수 없고 흔치 않으며 한결같이 고유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를 걸었던 요셉이나 하나님께로부터 크신 은총을 입었던 다니엘은 정직, 진실, 곧은 절개, 바른 신앙을 소유했던 참으로 귀한 그릇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정한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영적인 사랑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정도를 걸음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금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지혜의 유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잠언 10:1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비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능히 모든 것을 온전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란 육의 아버지나 조직의 상사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랫사람으로서 머리 되는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지혜로운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비진리로 나아가면 권면하고 눈물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녕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윗사람이 진리 안에 있다면 오직 윗사람을 기쁘게 하며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12:15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면이나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훈계받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훈계는 먼저 겪어 보아 깨달은 경험자가 아직 경험이 없는 아랫사람에게 깨우침을 줌으로 삶에 빛과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실수를 범치 않도록 하며 사전에 바로잡아 주어 사단의 송사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웃어른이나 앞선 경험자들이 가르침을 베풀어 줄 때 마음에 새겨서 즉시 개선한다면 값진 교양과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잠언 6: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라도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을 내세워 주저할 것이 아니라 칭찬받고 열매를 낸 사람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선이요, 유익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용서하라 하시면 기도하고 용서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법을 떠나지 않지요. 나라의 법을 잘 지킬 때 질서 안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안히 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3) 발견한 것을 개선하는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에게서 발견된 잘못된 점을 개선해 나갈 때에 명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명철'이란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는 길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명철은 이미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여 주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기도하고 사랑하며 용서했더니,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육간에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며 이런저런 명철의 길을 보여 주면 그대로 좇아 행함으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늘 보다 나은 상대를 비교해 가며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세, 지식 등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부족한 것을 깨우쳐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개선하여 발전시키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명심해야 하고 또한 주의깊게 살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라도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이사야 55:8-9 말씀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높고 넓으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각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열심히 일구어가면 더 아름답고 큰 사람으로, 더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릇됨을 발견하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달아 영과 육을 분별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야 만사형통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 지식이나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때에 맞게 바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해 쓰임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은 그 모략이 뛰어나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그도 함께 배반하여 압살롬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지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미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함께하시지 않으며, 결국 압살롬이 싸움에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윗에게 잡혀 죽느니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앞일을 예측할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선 가운데 행하지 않음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열왕기상·하에도 보면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권을 탈취한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결말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식이나 경험, 힘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각종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경우, 애굽의 왕자로서 많은 문물과 지식을 익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연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 지혜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이었지요.
2.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려면
세상에는 나름대로 경험도 있고 지식도 뛰어나지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상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그 방법을 가르침받기도 쉽지 않지요. 단순히 경험 또는 연단을 통해 '이것이 옳았구나' 아니면 '실수였구나' 하는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해결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분별치 못할 것이 없고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개선하면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자'(마 23:11)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자'(마 18:4)라고 말씀하시며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탓한다면 이는 큰 그릇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도 못하고 상대를 포용하지도 못하므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지요. 반면에 섬기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그릇이기에 마음먹은 대로 큰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0-21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귀한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날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 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존귀하게 여김받는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로, 변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변개함 없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금처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람들, 곧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빛의 열매, 그리고 팔복,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이 잉태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동정녀 마리아,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드렸던 막달라 마리아,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 등은 하나님께서 소중한 그릇으로 여기셨습니다.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람은 그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며 옥토와도 같아서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줍니다. 그 마음이 선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 안에서 품어 주고, 상대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던 아브라함 등이 이에 속합니다.
넷째로, 귀한 그릇입니다.
귀한 그릇은 쉽게 만들 수 없고 흔치 않으며 한결같이 고유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를 걸었던 요셉이나 하나님께로부터 크신 은총을 입었던 다니엘은 정직, 진실, 곧은 절개, 바른 신앙을 소유했던 참으로 귀한 그릇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정한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영적인 사랑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정도를 걸음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금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지혜의 유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잠언 10:1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비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능히 모든 것을 온전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란 육의 아버지나 조직의 상사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랫사람으로서 머리 되는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지혜로운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비진리로 나아가면 권면하고 눈물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녕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윗사람이 진리 안에 있다면 오직 윗사람을 기쁘게 하며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12:15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면이나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훈계받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훈계는 먼저 겪어 보아 깨달은 경험자가 아직 경험이 없는 아랫사람에게 깨우침을 줌으로 삶에 빛과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실수를 범치 않도록 하며 사전에 바로잡아 주어 사단의 송사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웃어른이나 앞선 경험자들이 가르침을 베풀어 줄 때 마음에 새겨서 즉시 개선한다면 값진 교양과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잠언 6: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라도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을 내세워 주저할 것이 아니라 칭찬받고 열매를 낸 사람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선이요, 유익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용서하라 하시면 기도하고 용서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법을 떠나지 않지요. 나라의 법을 잘 지킬 때 질서 안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안히 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3) 발견한 것을 개선하는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에게서 발견된 잘못된 점을 개선해 나갈 때에 명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명철'이란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는 길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명철은 이미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여 주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기도하고 사랑하며 용서했더니,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육간에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며 이런저런 명철의 길을 보여 주면 그대로 좇아 행함으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늘 보다 나은 상대를 비교해 가며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세, 지식 등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부족한 것을 깨우쳐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개선하여 발전시키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명심해야 하고 또한 주의깊게 살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라도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이사야 55:8-9 말씀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높고 넓으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각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열심히 일구어가면 더 아름답고 큰 사람으로, 더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릇됨을 발견하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21
제3과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 3:19-22
읽을말씀 : 롬 3:19-22 | 외울말씀 : 롬 3:20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영과 육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율법의 행위로 외식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며 연이어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엄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5-7에는 외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주의자들은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며 끌어내리려고 하는 등의 악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겉모양은 행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모습들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그들은 겉모양은 거룩한 것 같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중심에서는 행치 아니했고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죄 가운데 살며 불순종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진리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실망시키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2. 율법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마태복음 3:7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외식주의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없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행함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것이란 곧 마음의 할례를 말하며 이것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사랑과 희생, 섬김의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마 7:21).
3.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입술에는 원망 불평 탄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을 때에는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이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써 전도하고 충성 봉사하며 각종 예배에 참석하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행위적으로 잘 지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원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영이 아닌 육에 거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행위적인 발전일 뿐 정작 중요한 마음의 의는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육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다 해도 그 기쁨과 감사는 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에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상대를 판단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되므로 혹 누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이웃에게 알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약 4:11-12), 스스로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용서할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마 18:21-22) 원수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그러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보면 악한 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로 권면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위적으로는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내고 다투며 원수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내지 말라, 다투지 말라, 원수 맺지 말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등 자기 위치를 지켰다고 해서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요,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분냄과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사람이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속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고, 또한 겉모습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데, 죄를 품고 하는 기도에 응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6:18).
마태복음 5:3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분내고 다툰다면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1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율법은 오히려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내고 다툰다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비록 행위적으로는 기도나 봉사, 충성이 있다 해도 근본 마음이 개선되지 않으면 응답이 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함의 의는 마음이 개선되어야 나올 수 있으므로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하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다거나 언뜻 보기에 별로 위배된 것이 없으므로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진리로 비추어 보면 그 속에는 율법과 자기 중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개조도 안 된 채 다만 습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미지근한 신앙과 같아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계 3:16). 왜냐하면 차가운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철저히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미지근하면 아예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마음이 개선되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가운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겨난다 해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문제를 이웃에게 알리고 판단 정죄했을 터인데, 이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선한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 대입해 들어가니 어떤 옳지 못한 일을 보았다 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대를 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로 개간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곧 응답이 오며, 이미 쌓아 놓은 기도도 신속히 응답이 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빛 가운데 행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영과 육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율법의 행위로 외식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며 연이어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엄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5-7에는 외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주의자들은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며 끌어내리려고 하는 등의 악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겉모양은 행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모습들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그들은 겉모양은 거룩한 것 같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중심에서는 행치 아니했고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죄 가운데 살며 불순종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진리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실망시키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2. 율법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마태복음 3:7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외식주의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없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행함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것이란 곧 마음의 할례를 말하며 이것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사랑과 희생, 섬김의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마 7:21).
3.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입술에는 원망 불평 탄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을 때에는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이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써 전도하고 충성 봉사하며 각종 예배에 참석하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행위적으로 잘 지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원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영이 아닌 육에 거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행위적인 발전일 뿐 정작 중요한 마음의 의는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육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다 해도 그 기쁨과 감사는 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에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상대를 판단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되므로 혹 누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이웃에게 알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약 4:11-12), 스스로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용서할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마 18:21-22) 원수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그러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보면 악한 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로 권면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위적으로는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내고 다투며 원수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내지 말라, 다투지 말라, 원수 맺지 말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등 자기 위치를 지켰다고 해서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요,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분냄과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사람이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속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고, 또한 겉모습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데, 죄를 품고 하는 기도에 응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6:18).
마태복음 5:3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분내고 다툰다면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1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율법은 오히려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내고 다툰다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비록 행위적으로는 기도나 봉사, 충성이 있다 해도 근본 마음이 개선되지 않으면 응답이 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함의 의는 마음이 개선되어야 나올 수 있으므로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하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다거나 언뜻 보기에 별로 위배된 것이 없으므로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진리로 비추어 보면 그 속에는 율법과 자기 중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개조도 안 된 채 다만 습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미지근한 신앙과 같아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계 3:16). 왜냐하면 차가운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철저히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미지근하면 아예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마음이 개선되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가운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겨난다 해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문제를 이웃에게 알리고 판단 정죄했을 터인데, 이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선한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 대입해 들어가니 어떤 옳지 못한 일을 보았다 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대를 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로 개간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곧 응답이 오며, 이미 쌓아 놓은 기도도 신속히 응답이 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빛 가운데 행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14
제2과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잠 16:1-3
읽을말씀 : 잠 16:1-3 | 외울말씀 : 잠 16:2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07
제1과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읽을말씀 : 요 3:6 | 외울말씀 : 요 3:6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